"매매가가 15억원이 넘는데 대출이 4억원 이상 나온다고요?"
직장인 A씨는 최근 서울의 한 아파트 매수를 앞두고 깜짝 놀랐습니다. A씨가 매수하기로 마음을 정한 아파트의 매매가는 17억7000만원으로, 10·15 대책이 나온 후 대출 한도가 4억원으로 낮아지는 가격대입니다.
그런데 중개업자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습니다. 최대한도인 '6억원까지 대출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였습니다. 귀를 의심하는 A씨에게 중개업자는 대출을 더 받는 비결을 귀띔했습니다. 실제 거래가가 17억원을 웃돌아도, 민간 지수인 'KB국민은행 시세'(이하 KB 시세) 기준으로는 15억원 이하로 산정돼 있어 '15억원 초과 거래'에 규정되는 대출 규제를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A씨에게 집을 소개한 공인 중개 관계자는 "많은 고객이 대출 기준이 KB 시세라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실수요자 입장에서 규제가 얼마나 복잡하게 느껴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A씨 사례와는 반대로 실제 거래 가격이 15억원에 미치지 못하는데도, 대출이 막히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실제 거래 가격은 14억원대인데, KB 시세가 15억원을 상회하면 대출 제한에 걸리는 식입니다.
이처럼 현장의 실거래가와 서류상의 시세 사이의 간극은 실제 대출 가능 금액을 결정짓는 결정적 변수가 되고 있습니다.
대출 심사 시 기준으로 삼는 KB 시세나 한국부동산원 통계는 일주일 주기로 업데이트됩니다. 하지만 거래가 뜸한 하락기나 단기 급등기에는 이 통계가 현장의 실거래가를 즉각 반영하지 못하는 '지체 현상'이 발생합니다. A씨처럼 시세 갱신이 늦어진 틈을 타 규제 선을 우회하는 이들이 생겨나는 이유입니다.
실제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서울 용산구 산천동의 '리버힐삼성' 전용 59㎡의 KB 시세는 13억5000만원입니다. 그러나 현재 시장에 나와 있는 가장 저렴한 매물은 15억5000만원입니다. 호가대로 거래할 경우, 15억원 이상의 매물을 사는 것이지만 6억원 한도로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서울시 성동구에 위치한 '성수롯데캐슬파크'의 전용 59㎡도 KB 시세는 14억7000만원이지만, 실제 거래는 지난해 9월에 이미 15억4000만원 신고가를 새로 썼습니다.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에 있는 '청구' 아파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아파트 전용 59㎡의 KB 시세는 14억8000만원이지만, 실제 거래는 이미 16억8000만원 신고가를 경신하고 17억원대에서 호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현재 16억~17억원대로 거래되는 물건 중에는 이렇게 대출 규제를 피해 갈 수 있는 단지가 적지 않습니다. 또 한 번 대출 한도가 2억원으로 줄어드는 '25억원' 선의 거래에서도 비슷한 일은 발생합니다. 동일한 단지, 동일한 평형이라도 거래 시점에 따라 대출 가능 금액이 달라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금융당국은 개별 거래의 특수성이 반영돼 변동성이 큰 실거래가보다는 안정적인 지표인 KB 시세나 한국부동산원 통계를 기준으로 대출을 집행하는 것이 맞는다고 설명했습니다. 금융위 관계자는 "'고가 주택'이라는 판단은 개인이 아니라 시장이 하는 것"이라며 "고액 거래가 한 건 됐다고 해서 무조건 시세를 올리는 것도 맞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시세의 시차가 규제의 허점이라기보다는 시장의 급격한 변동성으로부터 소비자를 보호하는 완충지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취지로 풀이됩니다. 현장에서는 이런 틈새가 실수요자들의 목을 조이는 대출 규제 속에서 일종의 숨통이 될 수도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부동산 전문가는 "대출 한도가 조금이라도 더 확보되는 것은 실수요자의 자금 조달에 숨통을 틔워주는 측면이 있다"며 "만약 실거래가를 기준으로 대출을 실행하기 시작하면 다운계약(실제 거래가보다 낮게 신고하는 계약) 등 각종 꼼수와 편법이 난무하면서 시장 질서가 더 어지러워질 우려가 크다"고 말했습니다.
이슬기 한경닷컴 기자 seulk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