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산 제품에 부과하는 관세를 갑자기 25%로 되돌리겠다고 한 이유는 표면적으론 한국 국회의 입법 지연이다. 하지만 이는 표면상 이유일 뿐 다른 속내가 있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 명분은 “한국 국회의 입법 지연”국회에서 대미 투자 관련 입법 논의는 크게 두 가닥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문제 삼은 것으로 보이는 대미투자특별법은 국회 재정경제기획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입법 절차를 마치기 위해서는 재경위,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쳐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야 하지만 아직 재경위 심사도 이뤄지지 않았다.
국민의힘에선 아예 대미 투자 내용을 담은 ‘전략적 투자에 따른 양해각서(MOU)’ 자체를 비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대규모 투자를 약속하는 만큼 국회에서 충분한 정보 공개와 동의 절차가 필요하다는 논리다. 그러나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상호관세 부과 근거인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에 대한 판결이 곧 나올 것으로 예정된 가운데 한국 측에서 이를 입법 형태로 공식화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평가가 많다.
◇ ‘투자계획 지켜라’ 압박지난 20일 블룸버그통신이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발언을 들어 한국이 대미 투자를 늦추려 하고 있다고 보도한 것이 트럼프 정부를 자극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구 부총리가 “올 상반기에 3500억달러 대미 투자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한 것을 지적한 기사다. 최지영 재경부 국제경제관리관도 최근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의 환율 구두개입 이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미 재무부 측에 ‘외환시장 변동성과 불안이 커지면 대미 투자 이행을 제한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정부 입장에서 보면 한국과 일본의 대미 투자 약속은 지난 1년간 관세전쟁에서 올린 최대 수확이다.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 방에 한국·일본·유럽연합(EU)으로부터 투자받기로 한 금액을 각각 적은 패널이 트로피처럼 전시돼 있을 정도다. 트럼프 정부 관계자들은 이 투자금을 ‘트럼프 대통령 지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공짜 기여금’이라는 식으로 홍보하고 있다. 이것이 지연되거나 이행되지 않으면 트럼프 정부가 받을 타격도 크다.
미국 대법원의 상호관세 판결이 나오기 전에 한국의 입법 절차가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상대국에 상호 합의 사항을 좀 더 못 박는 과정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특별법이 빨리 국회를 통과하도록 압박하기 위한 협상용 메시지”라고 말했다. 관세 인하 시점을 ‘미국과의 무역협상 관련 입법안 발의 시’로 명시한 경우는 EU와 한국뿐인데, EU가 최근 그린란드 문제가 불거지면서 입법안 통과 절차를 연기하기로 하자 한국도 지연 전술을 쓰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커졌다는 것이다.
미네소타주에서 이민세관단속국(ICE) 요원이 미국 시민을 잇달아 사살해 국내 정치 환경이 악화하는 것도 트럼프 정부에는 대외정책에서 성과를 내야 할 필요성을 키우는 요인이다. ◇ ‘TACO’ 예상도트럼프 대통령은 앞서 그린란드에 파병한 유럽 8개국에 최고 2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했다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그린란드에서 미국의 활동을 강화하기 위한 프레임워크(기본틀)에 합의하면서 한발 물러섰다. EU와 체결한 관세협상 결과는 신경 쓰지 않고 내키는 대로 관세율을 바꿀 수 있다는 위협이다.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을 체결한 캐나다와 멕시코에도 이미 적용한 펜타닐 관세와 별개로 상황에 따라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위협을 거듭하고 있다. 시장의 반응이 커지거나 하면 한 발짝 물러서는(TACO·트럼프는 언제나 물러선다) 전략을 반복하는 만큼 한국에 대한 인상 요구도 철회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미국과의 협상 필요성 자체에 의문이 커지고 있다. 기업이 투자한 뒤에도 미국이 언제든 국가 안보를 이유로 지분을 요구하거나, 약속한 인센티브를 철회하거나, 매출의 일정액을 상납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는 우려도 생겨났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김대훈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