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가 전면 재검토를 선언하고 공론화 과정을 거쳤던 신규 원자력 발전소 2기 건설을 다시 원래 계획대로 추진하기로 하면서 원전과 인공지능(AI) 업계가 크게 안도하는 분위기다. 현장에선 인공지능(AI), 반도체, 데이터센터로 대표되는 초전력 산업 시대에 대한민국의 생존 전략을 재정비한 결정이라는 평가가 나온다.'원전 빅4' 한국, AI 시대 전력 패권 다시 쥔다27일 한 원자력 학계 교수는 "대한민국은 기술력만 놓고 보면 글로벌 시장에서 이미 미국, 프랑스, 중국과 함께 '원전 빅4'"라며 "원전 연구의 지속성을 확보한 것은 물론 AI, 반도체, 클라우드, 데이터센터 산업 전반의 총소유비용(TCO)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이번 정책 전환은 이재명 정부의 최대 업적이 될 수 있다는 평가까지 내놨다. 미국에서 원전 정책을 연구 중인 한 씽크탱크 연구원은 "원자력은 AI 학습용 그래픽처리장치(GPU), AI 가속기 등의 24시간 연속 가동을 보장하는 등 재생에너지와 달리 간헐성이 없는 유일한 안정적인 전원"이라며 "우리 정부의 이번 결정으로 많은 국가들이 한국에 원전 협력 요청을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전날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상의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을 예정대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최근 기후부가 여론조사 기관 2곳을 통해 실시한 대국민 여론조사에서 원전 찬성 여론이 압도적으로 나타나자 김 장관도 결과를 수긍하고 한 발 물러선 것이다. 윤석열 정부 시절이던 지난해 초 여야 합의로 수립한 11차 전기본에는 신규 원전 2기와 소형모듈원자로(SMR) 1기 건설이 반영됐다. 2.8GW(기가와트) 규모 원전 2기는 2037년과 2038년에 준공하고, 0.7GW 규모 SMR은 2035년까지 도입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이재명 정부는 그러나 이 계획이 국민 동의를 충분히 얻지 못했다며 원점 재검토를 선언했다.
기후부는 지난달 30일과 이달 7일 두 차례 정책토론회에 이어 최근에는 2개 기관을 통해 대국민 여론조사를 벌였다. 여론조사 결과, 한국에 원전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90% 가까이 나왔고, 제11차 전기본에 반영된 신규 원전 계획을 예정대로 추진해야 한다는 답변은 60% 이상 나왔다. 김 장관은 "전력 분야의 탄소 감축을 위해 석탄·LNG(액화천연가스) 발전을 줄일 필요가 있다"며 "재생에너지와 원전 중심의 전력 운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장관은 기존에 확정된 신규 원전 2기 외에 추가 원전 건설에 대해서도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는 2기 이상의 원전 건설 여부를 묻는 말에 "일부러 닫아두진 않고, 어느 정도 수준이 대한민국의 에너지 믹스에 맞는지를 12차 전기본에서 검토할 예정"이라고 했다. 원전 안전성 확보를 위해서 원자력안전위원회가 내년도 원자력안전 연구개발(R&D)에 총 629억 4200만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전문가들은 원전 비중을 확대하지 않고 기존 목표를 '유지'하려고만 해도 신규 원전 20기 건설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국원자력학회는 2050년 탄소중립과 AI 전력수요 등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추가 신규 원전이 필요하다거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원자력학회는 "폭증하는 AI·데이터센터 전력수요에 대응하고 2050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존 계획을 넘어선 추가 신규 원전 건설이 12차 전기본에 반드시 반영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학회는 "지금 대한민국은 탄소중립(환경), 경제적 에너지 공급(경제성), 에너지 안보(안정성)라는 '에너지 트릴레마(Energy Trilemma)'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AI 혁명으로 전력수요가 예측 범위를 넘어 급증하는 상황에서, 간헐성이 큰 재생에너지만으로는 전력망 안정과 수요 대응에 한계가 명확하다"며 "무탄소 기저전원인 원자력의 역할 확대는 선택이 아닌 필수 생존 전략"이라고 주장했다. 학회는 이미 미국, 프랑스 등 세계 주요국은 원전 이용을 대폭 확대하고 있으며 탈원전의 선봉장이었던 독일조차 최근 총리 회견을 통해 ‘탈원전이 전략적 실패였음’을 사실상 자인하는 실정이라고 강조했다.TSMC도 흔들렸다…AI 시대, 원전 없이는 국가 경쟁력도 없다원전 전환은 대만에서도 뜨거운 감자다. 대만은 지난해 5월17일로 40년 운영 허가가 만료된 마안산 원전 2호기의 가동을 중단했다. 그러자 엔비디아의 핵심 파트너로, 대만 국내총생산(GDP)의 10%를 웃도는 부를 창출하고 있는 TSMC가 탈원전 때문에 공장 가동을 중단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싹트기 시작했다. TSMC는 지난해 2분기 기준 대만 전체 전력의 12.5%를 사용했다. 대만 내 TSMC 팹 증설 계획을 감안하면 2030년께 TSMC가 사용할 전력은 대만 전체의 24%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라이칭더 대만 총통은 2024년 5월 취임사에서 대만을 'AI 아일랜드'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TSMC의 전력원을 뒷받침할 원전 가동을 중단시키면서 민심이 요동쳤다. 급기야 지난해 8월 23일 대만에서는 원전 3호기 재가동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국민투표가 시행됐다. 총 590만6370명이 참여해 29.53%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유효 투표 585만3125표 중 찬성 434만1432표(74.17%), 반대 151만1693표(25.83%)의 결과가 나왔다.
탈원전을 주장하는 민진당 텃밭인 대만 중남부조차 60% 이상이, 3호 원전이 있는 남부 핑둥에서도 58%가 찬성에 표를 던졌다. TSMC 블랙아웃, AI 전력 수요 급증, 중국의 해안 봉쇄에 따른 에너지 위기 등의 우려가 민심으로 나타난 셈이다. 다만 찬성표가 총유권자의 25%(500만523표)를 넘어야 한다는 조항 때문에 재가동 안건은 부결됐다. 라이 총통은 "민의를 존중한다"면서도 여전히 원전 재개에 미온적이다. 라이 총통은 현재 탄핵 위기에 직면한 상황이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 정부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한동안 가동을 전면 중단한 원전의 재가동 정책을 추진하는 가운데 원전 재가동을 찬성하는 일본인이 반대하는 이의 2배 수준인 것으로 조사됐다. 산케이신문은 지난해 11월 20∼21일 후지뉴스네트워크(FNN)와 함께 1021명을 상대로 전화 설문한 결과 64.4%가 원전 재가동을 지지한다고 응답했다고 23일 보도했다.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률은 29.1%였다.
일론 머스크 스페이스X CEO는 최근 CNBC와의 인터뷰에서 AI산업이 올해부터 극심한 전력 부족 사태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특히 "중국의 전력 생산이 로켓처럼 가파르게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국은 현재 58기인 원전을 2035년까지 최대 180기로 폭발적으로 늘려 '글로벌 AI G1'에 오른다는 구상이다. AI 업계 관계자는 "이번 원전 복귀는 단순한 에너지 정책이 아니라 AI, 반도체, 클라우드, AI 주권을 포괄하는 국가 정책 대전환"이라며 "대한민국이 미국·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AI 3대 강국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는 게 현장의 반응"이라고 말했다.
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