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데려오는 새, 삶을 남긴 영화〈튜즈데이〉

입력 2026-01-27 11:10
수정 2026-01-27 11:11
한국에서 뒤늦게 개봉한 선댄스영화제 출신 영화 <튜즈데이>는 영화가 아무리 별별 기괴한 상상의 세계를 펼친다고 해도 그 끝판왕급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는 마카우(부리가 커서 위협적으로 보이는 다소 체구가 큰 과의 앵무새이다. 금강앵무로 불린다.)가 나와 사람을 저승으로 인도한다. 일종의 저승사자다. 이 앵무새는 자유자재로 괴물처럼 커졌다가 작은 새로 줄어들었다가를 반복하며 이승의 삶이 다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의 숨을 거둬 간다.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이 앵무새를 원하지만, 막상 눈앞에 나타나면 두려움과 공포에 질린다.



상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영화 <튜즈데이>의 마지막 장면은 기묘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얼마 전 딸 릴리 튜즈데이(롤라 페티크루)를 떠나보낸 후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엄마 조라(줄리아 루이스 드레이퍼스)는 오랜만에 자신을 찾은 앵무새와 위스키를 한잔하려 한다. 조라는 식탁 건너의 앵무새에게 차라리 죽고 싶다고 말한다. 신이 있고 사후세계가 있다면, 딸 튜즈데이와 다시 같이 지낼 수 있을 것이고, 만약 없다면 살아갈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 말을 할 줄 알지만 약간 더듬고, 그래서인지 과묵한 앵무새는 조라의 말에 유독 오랜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리고 나중에 이렇게 화답한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엄마 조라는 깜짝 놀라지만 앵무새는 다시 천천히 그녀를 안심시키기 시작한다. “신은 인간의 방식으로는 존재하지 않아.” 그다음 말들이 사람을 흠칫 울게 만든다. 앵무새는 과연 뭐라고 했을까. 그건 영화를 공들여 다 보고 나서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영화를 만든 다이나 오니우나스 푸시치는 영리하게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맨 뒤에 숨겨 놓았다. 크로아티아 출신으로 장편영화를 처음 만드는 ‘초짜’ 감독이 어떻게 줄리아 루이스 드레이퍼스 같은 기성 코미디언 스타를 캐스팅할 수 있었을까. 그건 아마도 시나리오가 갖는 독자성을 미국 독립영화계의 신흥 강자인 A24가 알아봤고 공동 제작사인 BBC와 BFI(영국영화연구소)가 보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영화 예술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건, 이런 독특한 얘기를 ‘굴하지 않고’ 써대고, 그것을 알아보는 눈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앵무새가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그래서 왜 그게 감동스러운지는 공개하기 힘들지만 다만 이것 하나만은 말할 수 있다. 난치병으로 죽어가는 튜즈데이가 자신을 데리러 온 앵무새와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은 노래 한 곡 때문이다. 이 노래는 영화의 엔딩곡으로 다시 나온다. 전설의 갱스터 래퍼인 아이스 큐브가 1993년 발표한 싱글 <운수 좋은 날(It was a good day)>이다. 이 노래 가사에도 영화 <튜즈데이>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담겨 있다.

그냥 아침에 일어났어. 신에게 감사해야 해 / 모르겠는데 오늘 좀 이상한 것 같아 / 개가 짖지도 않고 스모그도 없어…..(중략)….존나 취했지만 토하진 않았어 / 집에 반쯤 갔는데 호출기가 계속 울렸어 / 오늘은 AK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어 / 좋은 하루였다고 해야 하나.
[Ice Cube - It Was A Good Day]

신에게 감사해야 하는가. 매일 하루가 시작하거나 혹은 끝날 때쯤 누군가는 감사할 것이고 누군가는 증오할 것이며 누군가는 무심할 것이다. 열다섯 살인 튜즈데이는 희귀 불치병으로 반신불수인 상태이며 점점 죽어가는 중이다. 튜즈데이는 스스로가 자신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는 것을 잘 안다. 그리고 아이답지 않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문제는 엄마 조라이다. 그녀는 딸이 죽어가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데 그러려면 방법은 그 병에 맞서 딸 대신 힘껏 싸우는 것이겠지만 오히려 많은 사람은 웬걸, 영화 속 엄마 조라처럼 회피하고 외면하며 심지어 도망치려 한다. 조라는 매일 오는 간호사가 있는 동안에는 집 밖 벤치에서 온종일 노숙자처럼 지내기를 반복한다. 조라는 최근에 직장을 잃었고 집에 있는 돈 될 만한 이것저것을 내다 팔며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



딸 튜즈데이에게 ‘말하는 앵무새’가 찾아온 것을 발견한 조라는 그와 힘껏 싸우다 (딸을 데려가지 못하게 할 요량으로) 새를 전화번호부 책으로 내리찧어 죽인 다음 휘발유를 뿌리고 불태워 버린다. 그래도 앵무새가 목소리를 내자 그녀는 가차 없이 (어쩌면 잘 익은) 새를 먹어 치운다. 자, 그러니 예상대로, 육신이 먹힌 대상의 영혼이 그걸 먹은 인간에게 전이된다. 엄마 조라는 앵무새가 그랬던 것처럼 몸이 집채만 해졌다가 작은 새처럼 됐다가를 반복하며 세상의 죽음을 수거하러 다닌다.

특이한 것은 조라 ? 튜즈데이 모녀의 집 밖 거리도 온통 죽음투성이라는 점이다. 런던 시내 여기저기가 불타고 있거나 거리에서 무슨 사고를 당했는지 한 남자는 하반신을 잃은 채 통증으로 괴성을 지르며 기어 다닌다. 튜즈데이를 돌보는 간호사 빌리(리아 하비)는 헐레벌떡 집으로 들어오며 튜즈데이에게 목이 잘린 개가 자신을 쫓아 왔다고 말하며 무서움에 떤다. 앵무새가 말을 하든, 엄마가 괴물로 변하든, 튜즈데이와 빌리가 그걸 비교적 순순히 받아들이게 되는 건 세상에 온통 죽음의 집단화 현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이제 일상이 됐으며 그건 인간의 힘으로 어쩌지 못한다는 자각 아닌 자각이 두 여성에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은 존재하는가. 인간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존재하는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방식으로 사후세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신은 이렇게 세상에 온통 죽음을 뿌려 놓고 있는가. 영화 <튜즈데이>는 신의 본질, 삶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신조차 인간 때문에, 인간 세상 때문에 왠지 우울해하고 고민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영화 <튜즈데이>는 기이한 스토리를 통해 아이러니하게도 신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만든다. 이것도 신의 뜻인가. 그것 역시 인간이 생각하는 신의 뜻에 불과한가. 그렇다면 신의 뜻은 다른 것인가. 열다섯 살 딸 튜즈데이의 죽음은 엄마 조라에게 역설적으로 삶의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죽은 자가 산 자를 불러낸다는, 요즘 식 유행어의 실현이 영화 속에서 구현된다. 엄마 조라는 간호사 빌리가 부르는 대로 아래층에 내려가서 치즈를 먹을 것이다.

독립영화이고 저예산영화지만 말하는 앵무새를 영상화하기 위해 제작비의 상당 부분이 사용됐을 것이다. 모두 CG와 특수효과로 처리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2023년에 제작됐고 2024년에 선댄스영화제에 나온 작품이다. 사람들이 코로나19로 많은 죽음을 목도한 후 이번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또 다른 집단적 죽음을 경험했을 것을 생각한 작품처럼 느껴진다. 내전의 역사를 지닌 크로아티아 출신인 만큼 감독인 다이나 오니우나스 푸시치는 죽음에 관한 생각이 남달랐을 것이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 수용 여부에 삶을 지속하려는 힘이 숨어 있을 것이다. 영화 <튜즈데이>로 새삼 깨닫게 되는 삶과 죽음의 진실이 남다르다. 삶은 계속된다. <튜즈데이>가 하려는 얘기일 것이다. SNL 출신 코미디언으로 유명한 줄리아 루이스 드레이퍼스의 정통 연기, 북아일랜드 출신의 롤라 페티크루의 청순한 연기가 눈에 밟힌다. 연기 앙상블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독일의 거장 빔 벤더스가 만든 <베를린 천사의 시>(1987)를 MZ 세대 식으로 만든 느낌을 준다. 지난 1월 14일 개봉했다. 관객 수 5천 명을 넘지 못했다. 한국의 관객들은 스스로 손해를 보고 있는 셈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