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유로당 1895원입니다."
지난달 중순 핀란드 헬싱키 공항. 한국 환율이 궁금해서 공항 환전소를 찾았다. 환전소 직원은 전산 환전표를 가리키며 이 같이 말했다. 지난해 한 때 유로당 1400원 선이었던 유로·원 환율은 지난해 1700원 선까지 치솟았다. 환전소 수수료까지 반영하면 1유로당 1900원에 근접한 것이다. 헬싱키 공항서 제일 저렴한 치즈버거와 물 한병을 사는데도 1만6000원이 넘었다. 한국의 원화가치는 달러는 물론 유로 등 다른 통화와 비교해도 크게 악화됐다.
원·달러 환율이 고공 행진하면서 원화 구매력이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장 나빠진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실질 환율은 1998년 IMF 외환위기,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후 역대 세 번째로 낮았다. 나빠진 한국의 경제 펀더멘털(기초체력)과 불어난 달러 수요 등이 겹친 영향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25일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지난해 월평균 한국의 실질실효환율(REER·2020년=100 기준)은 90.29로 집계됐다.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86.96) 이후 최저치다. BIS가 통계를 집계한 1994년 이후 기준으로는 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82.92),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86.96)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낮다.
실질실효환율은 자국 통화가 교역 상대국과 비교해 어느 정도 구매력을 갖췄는지 보여주는 지표다. 교역국과의 환율과 물가를 반영해 산출하는 것으로 수치가 100을 밑돌면 기준연도 대비 저평가됐다고 본다.
국가 비교에서도 원화의 위상은 최하위권이었다. 지난해 한국의 REER 순위는 64개국 중 63위로 일본(72.61)에 이어 두 번째로 낮았다. 원화의 실질 가치 하락 속도도 빨랐다. 지난해 한국의 REER은 전년 대비 4.30포인트 하락했다. 같은 기간 일본은 1.77포인트 상승했고 중국은 2.99포인트 하락하는 데 그쳤다. 월별로 봐도 지난해 12월 한국의 REER은 86.29로, 2009년 4월(85.47) 후 최저 수준까지 내려갔다.
실질환율 급락의 직접적 원인은 명목 원화 가치의 급락이다. 지난해 평균 원·달러 환율은 1422원16전으로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1398원88전)도 넘어서는 등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나빠진 경제 펀더멘털 등이 원화가치를 끌어내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의 잠재성장률부터 빠르게 나빠지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22년까지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2.45%로 미국(2.40%)을 웃돌았다. 하지만 이듬해인 2023년 미국은 2.44%로 한국(2.41%)을 처음 추월했고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 올해는 미국의 잠재성장률(2.0%)이 한국(1.71%)보다 0.3%포인트 높았다.
재정여건 악화도 환율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기획예산처의 2025~2029년 국가재정운영계획에 따르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지난해 48.1%에서 올해 51.6%로 처음 50%를 넘어선 데 이어 2029년에는 58%까지 치솟을 것으로 예상된다. 비기축통화국인 한국의 재정 여건 악화가 원화가치를 훼손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외환수급 여건이 팍팍해진 것도원화 약세를 부추겼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11월 해외주식 투자(국제수지 주식자산 투자)는 1024억2100만달러(약 150조원)로 전년 동기 대비 145.6%(607억2200만달러) 증가했다. 역대 1~11월 기준으로 최대 규모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중대재해법·노란봉투법 도입 등 기업환경 악화에 따라 직접투자 등으로 자금이 이탈하고 있다"며 "대미 투자 펀드 흐름에 따라 연간 200억달러가 빠져나가는 구조적 요인도 작용했다”고 했다.
원화 실질 가치 하락은 국민 체감 경제에도 부정적 영향을 줬다. 공항 환전 환율은 달러당 1500원대에 육박하고 있고, 주요 수입 식자재 가격이 줄줄이 급등하고 있다. 지난달 고등어 수입 가격은 전년 동기 대비 30.7%, 커피 27.6%, 바나나 19.7%, 밀가루 17.4% 상승했다. 원화 약세가 실질 구매력 약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