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제조업의 허리로 불리는 ‘미텔슈탄트(중소·중견 강소기업)’가 흔들리며 한국 기업의 ‘독일 쇼핑’이 본격화하고 있다. 미텔슈탄트가 관세 전쟁과 인공지능(AI) 확산 등 시대의 변화에 흔들리는 틈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23일 산업계에 따르면 국내 최대 공작기계 업체 DN솔루션즈는 이달 말 독일 공작기계 업체 헬러 인수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1894년 독일 뉘르팅겐의 장인 공방에서 시작된 헬러는 자동차 ·항공우주·방산 등 고난도 초정밀 공정에 특화된 독일의 대표적인 하이엔드 공작기계 업체로 꼽힌다.
4대에 걸쳐 가족 경영을 이어가던 헬러가 경영권 매각에 나선 것은 미텔슈탄트에 머물러선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판단에서 이뤄진 알려졌다.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공급망 위기와 핵심 고객인 독일 완성차 산업의 부진으로 헬러의 부채비율은 386%로 치솟았다. 여기에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관세 전쟁까지 겹치자 다양한 제품군과 수출 네트워크를 갖춘 대형 메이커인 DN솔루션즈로 매각을 결정한 것이다.
삼성전자는 작년에만 두 곳의 독일 제조업체를 사들였다. 삼성전자는 작년 11월 유럽 최대 냉난방공조(HVAC) 기업 플랙트 그룹을 인수했고, 12월 자회사인 하만은 독일을 대표하는 자동차 부품사 ZF 프리드리히스하펜(ZF)의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 사업을 사들이기로 했다. 건설장비 기업 두산밥캣도 독일의 소형 건설장비업체 바커노이슨의 경영권 인수를 검토했다 최종 철회했다. 이들 기업 모두 업력 100년이 넘는 왕년의 미텔슈탄트들이다.
장인 정신과 틈새 시장 1등을 장악하는 것으로 버텨온 미텔슈탄트 모델이 AI시대를 맞아 시험대에 올랐다는 분석이 나온다. 공정·공급망 데이터를 잇는 대규모 투자와 글로벌 인재 확보가 필수가 되면서 특정 영역의 강자에 머물러선 성장·생존이 어려워진 것이다.
독일연방통계청에 따르면 2021년 1만3993건이던 독일 내 기업 파산 건수는 2024년 2만1812건으로 56% 증가했다. 독일 신용평가 기관 크레디트리폼은 지난해 파산 건수가 2만3900건 수준으로 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기업 파산의 여파로 지난해 독일의 실업자 수는 294만8000여명, 실업률은 6.3%로 2013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권준화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고령화에 따른 승계난과 탈원전·러우 전쟁이 부른 에너지비 급등으로 독일 내 제조업의 경쟁력이 구조적으로 악화되고 있는 상황"이라며 "디지털·탈탄소 전환이 요구하는 투자 규모가 기존 미텔슈탄트의 내부 자본 역량을 넘어서면서 기업들이 매각과 외부 투자 유치로 눈을 돌리고 있다"고 말했다.“독일의 중소기업들이 대량 소멸(Massensterben) 위기에 빠졌다”작년 7월 독일의 중소기업 전문지 ‘마켓운트미텔슈탄트’는 “23분마다 한 곳의 기업이 문을 닫고 있다”며 이렇게 지적했다. 독일국영개발은행(KfW)는 작년 말까지 23만1000명의 미텔슈탄트(중소·중견 강소기업) 소유주가 폐업을 고려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를 내놔 독일 산업계에 충격을 줬다.
독일 제조업의 상징이던 미텔슈탄트가 매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세계 최고 장인 기업으로 불리던 강소기업들마저 고령화·고비용·공급망 충격을 못 버티고 외부 자본에 문을 두드리고 있다.○ 글로벌화 한계 봉착미텔슈탄트는 독일에서 중소·중견기업을 지칭하는 단어다. 하지만 미텔슈탄트란 단어엔 현장 중심의 장인 정신, 특정 공정 등 틈새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 지역 기반, 가족 경영 등 제조 강국인 독일의 특징이 녹아들어있다. 세계 시장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가졌지만 대중에겐 알려지지 않은 강소기업을 의미하는 단어인 ‘히든 챔피언’ 역시 미텔슈탄트에서 비롯됐다.
세계 제조업의 모범 사례로 통했던 미텔슈탄트 모델의 균열은 이미 10여년 전부터 감지됐다. 2015년 독일이 자랑하던 공작기계 업체 DMG가 일본 업체 모리세이키에 인수됐다. DMG는 1870년 독일 빌레펠트의 작은 선반 제작소에서 출발한 길데마이스터를 중심으로, 덱켈과 마호 등 세 개의 기업이 합쳐진 미텔슈탄트 신화의 상징으로 통했다.
DMG는 유럽 내 정밀 공작기계 분야에선 이미 강력한 기반을 갖추고 있었지만 고속 성장하는 아시아 시장에서 일본 기업의 아성을 넘을 수 없었다. 점차 시장 장악력이 약해지자 DMG가 생존을 위해 택한 선택지가 모리세이키와의 합병이다. 합병으로 탄생한 ‘DMG모리’는 부동의 세계 1위 공작기계 업체로 거듭났다. 하지만 공작기계 최강국이던 독일의 자존심은 이 때 큰 상처를 입었다.
2016년엔 세계 2위 산업 로봇 업체 쿠카(KUKA)가 중국 메이디그룹에, 플라스틱 가공용 기계 분야 세계 최고 기업이던 크라우스마파이가 중국화공그룹(CNCC)에 매각됐다. 이후 게트락(변속기), 보스로(디젤·전기 기관차), 오스람(조명), 비스만(공조)등 굵직한 제조 기업들이 해외로 팔려나갔다.
이들 기업들은 모두 자기 영역에서 강력한 시장 점유율을 자랑했다. 하지만 점차 치열해지는 경쟁 속에 한정된 시장과 폐쇄적 지배구조를 고집하는 미텔슈탄트로 남아선 대규모 연구개발(R&D)과 글로벌 생산 체계 구축에 필요한 자본을 구하기 어려웠다. ○ AI發 투자 못 따라가 ‘직격탄’이 때 유출된 제조의 노하우는 10년이 지나 부메랑으로 날아왔다. PwC에 따르면 독일 자동차 부품 업체들의 2024년 세계 시장 점유율은 23%로 10년 전보다 3%포인트 감소했다. 반면 같은 기간 중국 기업들은 점유율을 5%에서 12%로 끌어올렸다. 한때 독일의 수출 텃밭이던 중국이 이제는 독일 부품사를 잠식하는 가장 강력한 경쟁 시장으로 바뀐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중 갈등에 따른 시장의 블록화가 ‘수출로 버티는 독일식 모델’의 전제를 흔들었다. 저렴한 가격과 차세대 기술로 무장한 중국이 치고 올라오고, 미국은 보호무역으로 압박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불어닥친 공급망 충격, 탈원전에 따른 에너지 비용 급등, 경영자 고령화로 인한 승계난은 독일 제조업의 체력을 약화시켰다.
여기에 막대한 투자비가 필요한 AI 확산은 미텔슈탄트의 약점을 더 노출시켰다. 독일 컨설팅 업체 호르바트가 지난해 200개 미텔슈탄트를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이들 기업은 지난해 매출의 0.35%만을 AI 기술에 투자할 것이라 답했다. 전체 기업의 AI투자 비중(0.5%)의 70%에 불과한 수준이다.
독일 기업들의 매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독일 자동화 설비 제조기업 만츠AG는 독일 내 전기차 산업 위축 여파로 지난해 파산해 테슬라에 인수됐다. 타이어 및 수리 용품 분야 히든챔피언으로 불리는 레마팁탑, 글로벌 완성차 업체의 핵심 부품 공급사인 리겐트파인바우 등 미텔슈탄트가 매물로 나와 해외 자본과의 인수 협상이 진행 중이다.
산업계 관계자는 “예전엔 인수는 꿈도 못 꿨던 기업들이 매물로 쏟아지고 있다”며 “독일 현지에서도 중국으로의 매각에 대해선 우려하는 분위기가 커 한국 기업에게 기회가 열린 상황”이라고 말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