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보세요, 제 연기는 똑같아요"…유해진의 생존법 [김예랑의 씬터뷰]

입력 2026-01-22 16:21
수정 2026-01-22 18:20

"잘 봐봐요. 똑같아요. 크게 변한 거 없습니다. 이야기가 변할 뿐이죠. 제가 노력하는 부분은 그 이야기 속에 잘 녹아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제 작품 보면 다 똑같아요. 그냥 유해진이죠. 그 이야기 속에 잘 있냐, 불편하게 있냐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불편하게 있으면 연기를 못한 거고, 유해진인데 어색하지 않은 것 같아 그러면 잘 한 거죠. 작품마다 저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신에 녹아있자는 거예요."

데뷔 28년 차.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꾸준하고 단단한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배우. 누적 관객 수 톱5 안에 드는 '1억 배우' 유해진의 연기 철학은 단순하면서도 분명했다. 늘 다른 인물을 연기하지만, 자신을 바꾸려 애쓰기보다는 이야기 안에 자신을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는 것. 그 태도가 그를 오래 살아남게 했다.

1997년 스크린에 데뷔한 유해진은 오랜 시간 이름보다 얼굴이 먼저 알려진 배우였다. 단역과 조연을 오가며 필모그래피를 쌓던 그는 2005년, 이준익 감독의 영화 '왕의 남자'에서 전환점을 맞았다. 광대패의 일원 '육갑' 역으로 극의 리듬을 살리며 앙상블의 중심을 잡았고, 천만 관객을 동원한 이 작품으로 생애 첫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이후 그의 이름 앞에는 자연스럽게 '씬 스틸러'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듬해 영화 '타짜'에서 주인공 '고니'의 파트너 '고광렬'로 분한 그는 또 한 번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조연 이상의 존재감을 증명했다. 이후 주연으로 영역을 넓힌 유해진은 첫 원톱 주연 영화 '럭키'로 700만 관객을 모았고, 코로나 이후에도 비교적 안정적인 흥행 성적을 이어갔다. '올빼미'는 330만 명을 넘겼고, '파묘'는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지난해 개봉한 '야당'을 비롯한 최근 작품들 역시 고른 성과를 내며 그의 꾸준한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오는 2월 4일 개봉하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유해진이 유독 애정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22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유해진은 "영화를보고 많이 울었다"고 털어놨다.

"시사회에서 완성된 걸 처음 봤는데 생각보다 감정이 크게 올라오더라고요. 우리 이야기가 가볍게 소비되는 슬픔이 아니라서 그런지 보고 나서도 감정이 오래갔어요. 시간이 지나도 제게 많이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되게 좋은 작업이었어요."

연출은 절친한 사이인 장항준 감독이 맡았다. 캐스팅 과정에 대해 묻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평소처럼 가볍게 제안했으면 안 했을 것 같았던지 장 감독이 마치 진지한 것처럼 시나리오를 설명해 주더라고요. 색다르고, 쇼킹한 작품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시나리오 자체가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습니다. 모처럼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작품인 것 같아요. 이런 영화가 나오기 어렵습니다."

'왕과 사는 남자'는 조선 제6대 왕 단종 이홍위의 유배 시절을 스크린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단종은 1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숙부 수양대군에게 권좌를 빼앗긴 뒤 유배돼 1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군주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기존 사극들이 계유정난 전후의 정치적 격변과 권력 다툼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영화는 왕좌에서 밀려난 이후의 시간, 한 인간으로 살아간 단종의 마지막 여정에 시선을 둔다. 이야기는 1457년, 궁을 떠나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향하는 어린 선왕의 발걸음에서 시작된다.

영화는 화려한 궁궐이나 치열한 정치의 현장을 과감히 비켜서, 산골 마을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인물들의 감정과 관계에 집중한다. 유배지 광천골에서 단종은 더 이상 왕이 아닌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 그를 감시하고 보살피는 촌장 엄흥도, 그리고 그를 둘러싼 마을 사람들과의 일상에서 단종은 처음으로 명령이 아닌 선택, 권력이 아닌 관계를 경험한다. 영화는 이 과정을 통해 '왕 단종'이 아닌 '소년 이홍위'의 얼굴을 차분히 드러낸다.


"이 영화의 주제는 한 인간의 삶입니다. 비극적인 결말이지만, 그 안에서 다시 살아가려는 의지가 보이죠. 나약함으로만 끝나지 않는 이야기라는 점이 좋았습니다."

유해진은 생계에 허덕이는 산골 마을의 촌장이자, 유배 온 어린 선왕을 감시해야 하는 인물 엄흥도를 연기했다. "기록에는 두 줄밖에 남지 않은 인물이에요. 하지만 자기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어린 왕을 모셨다는 것 자체가 위대한 일인 것 같아요. 그 존경심이 관객에게 전해졌으면 했습니다."

단종 역을 맡은 박지훈과의 호흡도 인상 깊었다고 했다.그는 "촬영 들어가기 전에 통통하게 와가지고 사실은 걱정을 많이 했다"고 털어놨다. "'약한 영웅'을 했다고 하는데 제가 그것도 안 봤었고, 처음에는 걱정을 좀 많이 했습니다. 촬영 들어갈 때 반쪽이 되어서 오더라고요. 15kg을 뺐다고 해요. 촬영장에서 뭐 먹지도 못해서 너무 안됐을 정도였죠."

박지훈의 진정성은 유해진에게도 닿았다. 그는 "끼니때 되면 밥차 데려가 먹이는데, 위가 너무 작아져 있어서 고생을 너무 많이 했다"며 "그런데 단종의 모습이 확 나오더라"고 귀띔했다.

"감정신을 맞춰보는 데 그 에너지에 깜짝 놀랐습니다. 아역부터 했다는 걸 몰랐는데 발성부터 시작해서 내공이 엄청나더라고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에너지도 좋고, 표현도 가볍지 않아요. 감정신에서 '레디 고' 하고 들어갔는데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박지훈이 아닌 어린 단종으로 보였습니다."

극중 안재홍은 노루골 촌장으로 호흡을 맞췄다. 그는 "후배지만 대단한 배우"라며 "자기를 잘 만들어가는 좋은 배우"라고 칭찬했다. "그런 친구들을 보면 제가 자극을 받아요. 내가 고여있지 않았나란 생각을 하게 되죠. 괜찮은 배우들과 함께 할 때 새로운 자극이 되는 것 같습니다. 안주하지 말아야겠다. 강소주를 먹어야 하는구나. 하하. 아재 개그입니다."


유해진은 영화 촬영 때 감독과 교류하며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을 선호한다고 했다. 장항준 감독과의 작업은 그런 점에서 유독 편안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오랜 인연이 있는 사이라는 점도 작용했다.

"친구니까 '그냥 넘어가야 하나', '감독한테 이 말 하는 게 좀 그런가' 하는 생각 안 해도 됐어요.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오히려 좋은 게 나와요. 이번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였죠. 장 감독은 가벼운 분이죠. 너무 열려있고, 현명하게 받아주는 분이고요. 가벼움이 있지만 긍정적인 가벼움입니다."

이번 작품을 통해 장항준 감독의 또 다른 면을 봤다고도 했다. 그는 "이번에 하면서 이분이 글을 참 잘 쓴다고 느꼈다. 제가 제안하거나 요구하면 '이틀만 시간 줘' 하더라. 처음엔 작가한테 하청을 주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직접 쓰는 거더라"고 귀띔했다. 이어 "제작자나 피디 의견이 들어오면 방 잡아놓고 같이 앉아서 막 쓰고 '어때, 이거 죽이지 않아?' 한다. 결과물은 요구했던 것 이상으로 훨씬 좋았고, 생각이 좀 남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한국 영화계가 어려운 시기, 이 작품에 거는 기대 역시 솔직했다. 그는 "요즘은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면 겁난다. 이제는 BEP만 넘겼으면 좋겠다는 게 가장 큰 바람이다. 그래도 이 작품은 타깃층이 넓다. 가족이 함께 봐도 좋은 영화"라고 강조했다.

유해진은 긴 시간을 돌아 여기까지 온 지금, 이 순간,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묻자 그는 짧게 답했다. "잘 하자."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