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칼럼] 한국 시스템반도체 산업의 발전을 위한 제언

입력 2026-01-27 10:22
수정 2026-02-10 16:42

늘 서두에서 먼저 짚고 가지만, 한국은 명실상부한 반도체 강국이다. 기술 수준 또한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그 명성은 여전히 메모리반도체에 머물러 있다. 시스템반도체, 그중에서도 핵심인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 기업) 산업은 오랜 기간 육성 구호가 반복되어 왔지만, 아직 글로벌 시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기업은 나오지 못했다.

이는 기술력 부족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팹리스 산업을 둘러싼 생태계와 기업의 경영 방식에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상황에서, 한국 팹리스 산업 육성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잘못해 왔고, 앞으로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냉정하게 돌아봐야 할 시점이다. 현 정부의 시스템반도체 육성 정책과 의지는 과거 어느 정부와 비교해도 전폭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말 그대로 마지막 승부를 걸어야 할 때다. 생태계 못 갖춘 한국 팹리스 산업과거 정부 정책의 공과를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간 정부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단계적 지원 정책을 꾸준히 추진해 왔다. 근본적인 문제는 기업에 있었다. 팹리스 산업이 성장하지 못한 책임을 전적으로 정책 실패로 돌리기에는, 기업 스스로의 책임이 더 크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 시스템반도체, 특히 팹리스 산업이 도약하지 못한 원인은 설계 기술이 아니라 사업 사슬에 있다. 팹리스는 공장이 없다는 이유로 진입 장벽이 낮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막대한 초기 자본과 장기간의 무매출 구간을 견뎌야 하는 고위험 산업이다. 그럼에도 한국은 팹리스 성장을 떠받칠 앵커 고객, 재사용 가능한 설계자산(IP), 검증 인프라, 숙련된 설계 인력, 소프트웨어 생태계를 동시에 갖추지 못했다.

특히 국내 대기업 중심의 수요 구조는 신생 팹리스에 안정적인 레퍼런스를 제공하기보다는, 특정 고객 맞춤형 개발에 종속되는 구조를 만들어 왔다. 그 결과 팹리스 기업들은 제품 회사가 아니라 과제·프로젝트 수행 회사로 굳어졌다. 테이프아웃을 성과로 착각하지 말아야한국의 1세대 팹리스 기업들은 분명 산업의 길을 닦았다. 그러나 세 가지 구조적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첫째, 테이프아웃 자체를 성과로 착각했다. 칩을 만드는 것이 목표가 되면서 반복 판매 가능한 제품과 플랫폼은 축적되지 않았다.

둘째, 국내 고객 의존에 안주했다. 단일 고객의 규격에 맞춘 칩은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기 어렵다.

셋째, 소프트웨어와 개발자 전략을 경시했다. 하드웨어 성능만으로는 시장을 열 수 없는데도, SDK·툴체인·레퍼런스 구축은 늘 후순위로 밀렸다.

오늘날의 칩은 더 이상 단독 상품이 아니다. SDK, 컴파일러, 모델 최적화 도구, 레퍼런스 보드, 문서, 커뮤니티까지 모두가 제품의 일부다. 이 흐름을 간과한 채 하드웨어 중심 경쟁에 머무는 순간, 글로벌 플랫폼 기업과의 경쟁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

현재 남아 있는 일부 1세대 기업들은 일정 수준의 생존력을 확보해 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고객 집중 구조, 플랫폼화 지연, 글로벌 세일즈와 파트너십 부재라는 문제를 반복하는 기업들도 적지 않다. 반면 최근 등장한 신생 팹리스 기업들은 확연히 다른 접근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과거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장을 개척하고 있으며, 이미 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차이는 기술보다 경영 방식에서 더욱 분명하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보다, 어디에 쓰일 것인가를 먼저 정의한다.

R사는 양산과 상용화를 전면에 내세우며 합병을 통해 규모를 키워 국내 최대 AI 반도체 스타트업을 표방하고 있다. D사는 엣지 AI를 중심으로 사용 시나리오 기반의 설계 철학을 강조한다. M사는 대만 파트너 네트워크를 활용해 해외 채널을 먼저 구축하고 양산을 추진 중이다. P사는 상장 과정에서 신뢰 이슈가 법적 리스크로까지 확대되었으나, SSD 컨트롤러라는 명확한 제품 영역에서 실질적인 시장을 만들어 가고 있다. 현재 한국 팹리스 기업 가운데 분명한 제품 가치를 보여주고 있는 드문 사례다. 기술 개발 전 사업 시스템부터 설계 이들 신생 기업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기술 개발 이전에 공급망을 포함한 사업 시스템을 먼저 설계한다는 점이다. 데이터센터, 엣지 AI, SSD 컨트롤러 등 사용처가 분명한 시장 세그먼트에 집중하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하나의 제품으로 설계한다. 컴파일러, SDK, 모델 최적화까지 포함한 개발자 경험을 판매하며, 턴키 생태계를 경영 전략으로 활용한다. 처음부터 글로벌 시장을 전제로 움직인다는 점도 과거와 결정적으로 다르다.

앞으로 한국 팹리스 기업들이 취해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국내 고객을 활용하되, 글로벌 재사용이 가능한 레퍼런스를 만들어야 한다. 국내 대기업 수요는 기회이지만, 종속은 위험이다. 처음부터 해외 시장에서 재사용 가능한 형태로 표준 인터페이스, 문서, SDK, 레퍼런스 보드를 구축해야 한다. 특히 AI 칩은 성능보다 개발 난이도가 구매를 좌우한다. SDK, 컴파일러, 모델 최적화, 레퍼런스가 곧 제품이다.

또한 IP 기반 설계는 복잡도, 개발 기간, 리스크를 줄이는 핵심 수단이다. 인력난을 채용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재사용 가능한 설계 자산을 축적해 생산성을 끌어올려야 한다. IP와 검증 자산은 단기 성과가 아니라 기업의 장기 자산으로 관리되어야 한다.

테이프아웃 이후가 진짜 시작이다. 웨이퍼, 패키징, 테스트, 리워크, 수율, RMA로 이어지는 양산·품질·공급망 체계가 없다면 고객은 두 번 주문하지 않는다. 양산과 운영 역량은 기술만큼이나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좋은 스토리보다 흔들리지 않는 사실이 중요하다. 최근 일부 상장기업들이 단편적인 뉴스 흐름을 활용해 증자를 진행하며, 그 과정에서 개인주주들의 신뢰를 소모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몇 차례의 공시만으로 손쉽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는 인식은 기업 가치와 자본시장 신뢰를 동시에 훼손한다. 특히 기술 기업일수록 신뢰를 회복하는 데 드는 비용은 훨씬 크다. 기업의 대표는 단기적인 자금 조달보다 거버넌스와 신뢰를 장기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인식하고, 이를 경영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

이제 필요한 것은 기술 담론이 아니라 경영의 전환이다. 칩을 만드는 회사에서, 고객의 성공을 납품하는 회사로 전환될 때 비로소 한국 팹리스 산업의 다음 장이 열릴 것이다.

김서균 지티랩 사업본부장은공학 박사로 한국팹리스산업협회 사무총장, 한·EU 반도체 R&D 협력센터 센터장을 역임한 팹리스 분야 전문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