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적이며 폭발적"…무용계 오스카상 거머쥔 일무, K컬처 새 역사

입력 2026-01-21 16:50
수정 2026-01-21 16:51
한국무용이 ‘일’을 내고야 말았다.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를 기리는 전통춤을 재해석한 서울시무용단의 ‘일무’가 ‘무용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미국 베시 어워드(The Bessies)에서 최우수 안무가·창작자상을 거머쥐었다. K팝과 K영화, K뮤지컬 등에 이어 전통무용까지 바야흐로 K컬처의 시대가 무르익고 있다. ◇ 전통 무용 현대적으로 재해석20일(현지시간) 뉴욕 딕슨 플레이스에서 열린 41회 베시 어워드 시상식. 뉴욕 무용·퍼포먼스계 최고 권위의 시상식답게 세계 각국의 쟁쟁한 무용수와 안무가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일무’의 정혜진·김성훈·김재덕 안무가가 후보로 이름을 올린 건 2024년 최우수 안무가·창작자 부문이었다. 후보만 12팀에 달해 그 누구도 수상 결과를 낙관하기 어려운 순간. 첫 번째 수상자로 일무의 안무가 3인이 호명됐다. 이 시상식에서 한국 국공립 예술단체의 작품으로 한국인 안무가가 수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무대에 오른 정혜진 안무가는 감격에 찬 목소리로 “Surprised(깜짝 놀랐다)”고 입을 뗀 뒤 한국어로 수상 소감을 이어갔다. 그는 “‘일무’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한 마음으로 버텨온 사람들의 정신이 들어간 작품”이라며 “(이번 수상은) 그 시간을 견디며 서로 믿어온 신뢰와 많은 분들이 함께 노력해온 시간의 결과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베시 어워드 선정위원회는 ‘일무’를 선정한 이유로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한국 전통 의례 무용으로 시각적으로 매혹적”이라며 “정중동의 완벽한 조화를 보여줌과 동시에 폭발적이고 역동적인 춤으로 정점을 찍었다”고 설명했다. ◇ 뉴욕 링컨센터 공연도 전석매진‘일무’는 출발부터 실험성이 강한 작품이었다. 비교적 널리 알려진 민속춤이 아닌,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유산이자 국가무형문화재인 종묘제례악을 뿌리에 뒀다는 점에서다. 종묘제례악은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에서 제사를 올릴 때 거행되던 춤과 음악, 노래를 뜻한다. 여기서 ‘일무’는 열을 맞춰 춤추는 ‘일무(佾舞)’와 궁중무용 ‘춘앵무’를 현대적 몸짓으로 절묘하게 녹여냈다. 한국무용 전공의 정혜진과 현대무용에 강점을 가진 김성훈·김재덕의 시너지가 빛을 발하며 약 3개월 만에 안무를 완성했다. 2022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초연한 ‘일무’는 이듬해 1800석 규모의 뉴욕 링컨센터에서 3회차 공연이 개막 전 매진되며 ‘무용의 메카’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여백의 미가 살아있는 ‘일무’ 무대에는 많게는 49명의 무용수가 오른다. 하지만 개개인이 도드라지는 건 금기와 같다. 공연 진행에 따라 따라 전통춤에서 창작무용으로 몸짓을 바꾸는 데 온 힘을 모을 뿐 개성을 드러내는 순간 칼군무는 흐트러지고 만다. 김성훈 안무가는 앞서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무’는 무용수들의 눈썹 각도까지 맞춘 절제된 작품”이라며 어려움을 표현했다. ◇ 한국의 창작 역량 입증무용수들의 완벽한 합은 카타르시스로 이어진다. 공연 초반, 느린 장단에 맞춰 고요한 움직임을 이어가던 무용수들은 활 쏘기가 연상되는 동작 등으로 점차 폭발적인 에너지를 뿜어낸다. 김재덕 안무가는 이날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극적인 춤사위가 많은 현대무용과 달리 한국 전통무용에는 중용의 미학이 깃들어있다”고 설명했다.

패션 디자이너 출신 정구호가 연출을 맡은 것도 ‘신의 한 수’였다. 국립무용단의 ‘묵향’, ‘향연’ 등으로 전통무용의 새로운 길을 제시해온 그는 전통의상에선 잘 사용하지 않는 색을 과감하게 활용했다. 가령 5방위를 상징하는 오방색 중 노랑색 대신 주황색을 써 무사의 강렬함을 중화시켰다. 정 연출은 이날 전화 인터뷰에서 “한 나라의 전통무용이라고 하면 고리타분하고 지루하다는 생각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며 “K팝에 열광하는 요즘 관객도 작품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색과 움직임, 동선 등의 변화를 통해 전통을 현대적으로 보여주려고 했고, 이 점이 뉴욕에서도 통한 것 같다”고 말했다.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은 “이번 수상은 세종문화회관이 제작극장으로서 축적해온 창작 역량이 세계적 기준에서도 유효함을 증명한 결과”라며 “한국을 넘어 세계 동시대 예술 담론의 중심으로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순간”이라고 평가했다.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