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서현(본명 서주현)은 자신을 “열정 부자”로 부른다. 예술에 대한 그녀의 집념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류를 이끌었던 아이돌 그룹 소녀시대로 연예 활동을 시작했다. 힘든 연습생 시절을 거쳐 오른 그룹 내 최연소 자리였다. 배우로서도 자신만의 꽃을 피웠다. 오는 3월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선 세상이 깜짝 놀랄 도전을 한다. 몬티의 바이올린 명곡 ‘차르다시’를 연주한다. 바이올린을 취미로 하는 이들에게 ‘꿈의 곡’으로 꼽히는 난곡이다.
서울 강남구에 있는 자신의 소속사인 꿈이엔티에서 만난 서현의 왼손가락 하나엔 테이핑이 둘려 있었다. 하루 10시간씩 바이올린을 연습하느라 손가락에 걸린 부하가 커져서다. 다른 한 손으로라도 보잉 연습을 하며 공연 준비에 전념하고 있다. “체력만큼은 자신 있어 3일 밤새 연습해도 힘들지 않다”고 말하는 서현의 눈은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했다.
“호흡이 멈춰 있으면 죽어있는 거예요. 노래도, 연기도, 피아노도 그래요. 바이올린에서 항상 숨을 쉬는 건 제 평생의 숙제가 될 것 같아요.”
“임윤찬의 골드베르크에서 숭고함 느껴”
아마추어 연주자들이 모여 활동하는 악단인 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오는 3월 13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정기연주회를 한다. 서현이 이 무대에서 협연한다는 소식은 ‘바이올린 경력이 5개월 남짓’이란 풍문이 더해져 클래식 음악계의 뜨거운 감자가 됐다. “일반인 아마추어라면 오를 수 없는 자리에 쉽게 선다”며 연예인의 협연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서현 자신도 “저를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하면 안 된다”며 전문 연주자와 거리를 두는 건 마찬가지. 그런데도 공연으로 전하려는 바는 확고하다. “제가 벽을 깨려는 모습을 보시는 분들이 ‘도전하는 삶은 다채롭고 재밌다’는 걸 느껴주셨으면 합니다.”
클래식 음악과 서현의 인연은 아이돌 연습생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의 어머니는 플루트와 피아노를 전공해 피아노 학원을 운영했다. 서현도 다섯 살에 처음 피아노 건반 앞에 앉았다. 얼마 안 가 바이올린도 잡아 4년을 배웠다. 장구와 상모 돌리기도 배우던 당시엔 바이올린의 매력을 잘 몰랐다. 꿈은 피아니스트여서 피아노 전공 교수를 찾아가 배울 정도였지만 SM엔터테인먼트가 그녀를 가수로 캐스팅하면서 클래식 음악은 한동안 잊힌 추억이 됐다. 연습실에서 피아노를 치곤 했지만 전념하겠단 생각은 없었다.
클래식 음악은 첫사랑을 다시 마주치듯 불쑥 찾아왔다. 2년 전 우연히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연주를 들은 게 시작이었다. ‘모 아니면 도’란 생각에 한번 빠지면 끝을 보는 성격. 3년간 비지찌개에 빠졌던 그녀답게 서현은 지난해에만 클래식 음악 공연 30여회를 봤다. 지난해 봄 임윤찬이 선사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공연은 충격적이었다. “(임윤찬이) 처음부터 끝까지 여정을 보여주는 데 인간의 몰입력이 저렇게까지 될 수 있다는 걸 보고 놀랐죠. 연기를 할 땐 100% 몰입하기가 어려워서 90%와 100%를 오가요. 그런데 (임윤찬은) 모든 순간에 100% 몰입하더라고요. 마치 신을 보는 것 같은 숭고함을 느꼈어요.”
음악적 취향은 피아노에서 바이올린으로 옮겨갔다. 차이콥스키, 시벨리우스, 파가니니 등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레퍼토리가 됐다. 김봄소리, 힐러리 한과 같은 바이올리니스트의 음악을 찾아 듣고 자닌 얀선 공연에서 행복감을 만끽했다. 지난해 12월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가 선보인 텔레만 ‘환상곡’ 공연에선 존경심을 느꼈다. “순수예술에서 자신을 희생하면서 음악을 해내시는 분들의 공연을 보는 건 경이로운 순간이었어요.”
'꿈의 곡'이었던 차르다시로 협연 결심
청취로 만족하지 못한 그녀는 그랜드 피아노를 사 건반을 두드렸다. 실력이 부족해서인지 소리가 맘에 안 찼다. 박종화 서울대 음대 교수를 찾아가 손가락 마디마디에 관절염이 생길 정도로 피아노에 빠졌다. 그러다 솔직한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에 마음이 갔다. 지난해부터는 피아노 스승에게 바이올리니스트 김현정을 소개받아 바이올린을 배웠다. “바이올린은 온도 습도에 따라 매일 소리가 달라지는데 이 점이 인간적이에요. 사람도 항상 기분이 좋을 수만은 없는데 악기에도 이런 감정이 숨 쉬듯 드러나는 느낌이죠. 어렵지만 매력 있는 악기였어요.”
바이올린을 취미로 켜며 마지막 목표로 둔 곡은 차르다시. 바이올린 스승은 “언젠가 차르다시를 연주하고 싶다”는 서현의 말에 “할 수 있어요”라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번 공연도 제안했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에너지를 같이 느끼는 자리”란 말에 서현은 협연을 결심했다. 대형 공연장에서 바이올린 독주가 소리를 관객에게 전하기 쉽지 않다는 점도 감안한 결정이었다. “바이올린과 아직은 내외하고 있어요. 바이올린이 예민하다 보니 습도가 높은 날엔 서로 울어요(웃음). 서로가 더 많이 알아가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요.”
음악은 본업에서도 자극이 됐다. “가수도, 배우도 감정을 담아 표현하잖아요. 어디에 바이브레이션과 호흡을 얼마나 줄 건지, 표정을 어떻게 할 건지와 같은 요소는 예술의 공통된 부분이라서 바이올린 연주가 노래나 연기에도 도움이 돼요. 피아노가 특히 연기에 유익했어요. 예전엔 피아니시모(매우 여리게), 포르테(강하게), 돌체로(달콤하게) 이런 악보 표시에 맞춰 배우고 연주했다면 지금은 프레이즈마다 어떤 감정을 느끼고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를 상상하려 해요. 수많은 자기와의 싸움을 거치지 않고 지식 없이 해버리는 해석은 해석이 아니더라고요.”
“클래식 음악 홍보대사처럼 계속 얘기해요”
서현의 일상엔 이미 클래식 음악이 녹아 있다. 스마트폰 모닝콜 알람은 파가니니 24개 카프리스 중 9번과 14번. 쉴 땐 친구와 연습실을 빌려 같이 연주하거나 LP바를 찾아가 명반에 심취한다. 멋진 연주자 영상을 SNS로 나누거나 경남 통영시까지 내려가 공연을 본다. 임윤찬 리사이틀을 예매하려 ‘광클(마우스를 연속해서 클릭하는 행위)’을 하는 건 다른 사람들과 똑같다. 그렇게 지난해 3월 경기 고양시에서 임윤찬 공연을 앞자리에서 봤을 땐 “운을 다 썼다”는 생각도 했단다.
“제가 공포심을 느껴서 MRI(자기공명영상)를 찍질 못했는데 한 번은 (의사 선생님께서) 음악을 틀어준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임윤찬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꼭 틀어주세요’라고 부탁드렸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니 촬영을 견딜 수 있겠더라고요. 음악이 삶의 원동력이 된 거죠. 이게 무슨 힘인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이 힘을 분명히 느끼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클래식 음악 홍보대사처럼 계속 얘기하는 거죠. 지루하다는 선입견을 갖는 분들도 계시지만 ‘클래식 음악도 들어보면 가요만큼 즐겁고, 록만큼 행복하다’고 말이죠.”
언젠가 독주회를 여는 게 꿈이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실력과 레퍼토리를 쌓아 도전하고 싶단다. 그녀를 응원해 온 팬들이 기다리는 무대다. “시벨리우스와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도 좋아해서 챗GPT에 ‘몇 년 배우면 할 수 있을까’ 물었더니 못 한대요(웃음). 그냥 듣기만 하고 꿈꿔야겠다는 마음이죠.”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꿈을 묻자 서현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니라 바린이(바이올린 하는 어린이)”라고 했다. “음악 덕분에 삶의 색채가 달라졌어요. 힘들어도 음악 하나로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겼죠. 팬분들이 저희(소녀시대의) 음악을 들으면서 항상 해주셨던 말을 이제 제가 느낍니다.”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