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는 살아있다. 밀려왔다가 부서지고, 다시 일어섰다가 물러나길 반복하는 생명력을 품었다. 들숨과 날숨도 그렇다. 의식하지 않아도 계속되는 이 리듬 속에 우리의 숨결이 이어지고 있다.
올해로 다섯번째 시즌(오연·五演)을 맞은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우리가 잊고 지내던 생(生)의 박동을 무대 위로 끌어올리는 작품이다. 2014년 프랑스 작가 마일리스 드 케랑갈이 쓴 동명 소설을 프로젝트그룹 일다가 무대화했다. 2019년 국내 초연 당시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화제를 모았다. 2022년 삼연부터 손상규, 김신록, 김지현, 윤나무 등 믿고 보는 네 명의 배우가 고정 멤버로 출연하며 1인극을 이끌고 있다.
작품은 뇌사 상태에 빠진 19세 청년 '시몽'의 심장이 51세 여성 '끌레르'의 몸에 이식되는 24시간을 촘촘히 따라간다. 사고 직전까지 거친 파도를 가르며 서핑을 즐기던 시몽은 교통사고를 당한 뒤 돌이킬 수 없는 뇌손상을 입는다. 그의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지만 의학적으로는 사망 상태다.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마주한 부모는 어렵게 장기이식에 동의한다. 푸르른 바다를 담던 아들의 두 눈만은 제발 남겨달라는 부탁과 함께.
소설을 옮겨온 작품답게 인물의 감정 묘사가 미세혈관처럼 세밀하다. 시몽의 엄마가 남편에게 아들의 사고 소식을 처음으로 전할 때의 처참한 감정처럼 일상에서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을 현실감 있게 전달한다. 시몽의 심장을 이식 받은 끌레르의 대사도 평상시 생각해보지 못한 수혜자의 입장에 설 수 있게 한다. "저에게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심장을 받아 고맙다는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작품에는 무려 16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시몽의 부모와 여자친구, 장기기증 절차를 안내하는 코디네이터, 심장을 적출하는 의사까지 모든 배역을 한 명의 배우가 연기한다. 연극 창작집단 '양손프로젝트' 멤버인 손상규 배우는 최근 무대에서 이 16명을 집어삼킨 듯 때로는 차가운 의사의 목소리로, 때로는 사랑에 빠진 시몽의 얼굴로 갈아끼우며 무대를 누볐다. 덕분에 어두운 적막이 감돌던 객석에서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무대 위 소품은 책상과 의자 뿐이다. 절제된 조명과 음향 연출이 오히려 감정의 파고를 극대화한다. 의사가 시몽의 심장을 적출하기 위해 메스를 대는 순간, 천장에서 하얀 빛이 일직선으로 내려오고 그 빛은 서서히 확장하며 절개의 순간을 은유한다. 의사의 손 위에 올려진 심장을 표현할 때도 붉은 색이 아닌 흰 색 핀조명으로 암시한다. 사실적이지 않은 연출이지만 관객 모두 수술실에 들어온 듯 숨을 죽이게 된다.
파도 소리는 시몽이 서핑을 하던 공연 초반에 이어 수술실에서 한 번 더 울려 퍼진다. 시몽 아버지의 부탁을 받은 의사는 시몽의 심장을 떼어내기 직전, 파도 소리가 흘러나오는 이어폰을 그의 귀에 꽂는다. 서핑 보드에 오른 시몽이 파도를 거슬러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끌레르의 새 심장 안에 커다란 파도가 덮치는 영상으로 심장 이식이 성공했다는 것을 표현한 점도 인상적이다. 공연이 끝나고 로비 바닥에서 상영되고 있는 파도 영상은 마치 시몽을 다시 만난 듯한 여운을 남기며 관객의 발길을 붙든다.
한 해를 시작하는 공연으로 추천할 만하다. 파도 속을 유영하듯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100여분간 몰입할 수 있다. 오는 3월 8일까지 서울 중구 국립정동극장에서.
<!-- notionvc: d4615238-50e2-44bb-86ab-cb0ee1daab33 -->허세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