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두 채 날렸다"…정부 믿고 35억 투자했다가 '초토화'

입력 2026-01-19 16:51
수정 2026-01-20 01:39

부산에 있는 국내 최초의 종이 빨대 제조사 민영제지가 파산 상태에 놓였다. 정부가 빨대를 비롯한 일회용품의 탈(脫)플라스틱 정책을 사실상 포기해 주문이 모조리 끊긴 탓이다. 이 회사 대표는 19일 “그동안 35억원 이상 투자했는데 판로가 끊기면서 공장 임차료를 낼 수 없어 설비를 처분하고 있다”며 “가지고 있던 집 두 채를 팔고 지금은 월세를 살고 있다”고 허탈해했다. ◇고사 위기에 놓인 친환경 빨대업계 정부의 오락가락 행정에 국내 친환경 빨대업계가 초토화 위기를 맞고 있다. 2022년 플라스틱 빨대를 금지하겠다는 정부 방침에 따라 수년간 설비투자에 나섰다가 정부가 갑자기 지난해 12월 탈플라스틱 정책을 고집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다. 당시 기후에너지환경부는 “빨대를 매장 내 비치하는 것은 금지하되 소비자가 요청하면 소재와 상관없이 제공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빨대 소재를 구분하지 않으면 업체 입장에선 값싼 플라스틱 빨대를 사용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매머드, 빽다방 같은 저가 커피 업체는 매장에 플라스틱 빨대만 비치하고 있다.

친환경 빨대 업체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최광현 종이빨대생존대책협의회 대표는 “카페 등을 중심으로 가격이 절반 이하인 플라스틱 빨대로 시장이 재편될 것”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국내 친환경 빨대산업이 어떻게 버틸 수 있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분해되는 플라스틱(생분해) 빨대를 생산하는 동일프라텍의 김지현 대표는 “탈플라스틱을 외치던 정부가 다시 플라스틱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며 “유럽 등은 친환경 빨대를 장려하는데 한국은 정반대로 가는 꼴”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17곳이 경쟁하던 종이 빨대업계는 2023년 11월 플라스틱 규제가 무기한 연기된 이후 판로가 열리지 않아 3~4개 업체가 간신히 명맥을 잇고 있다. 생분해 빨대업계 역시 제조사마다 수년간 수십억원을 투자해 신소재 제품을 개발했으나 이번 정부 발표 이후 반품과 계약 해지가 이어지고 있다. ◇“중국산 빨대가 시장 장악할 것”기후부는 지난해 용역을 의뢰한 한국전과정평가학회의 전 생애주기 평가(LCA) 보고서를 정책 변경의 주요 근거로 삼았다. 플라스틱 빨대가 기후변화, 인체 독성(발암), 미세먼지 형성 등 16개 환경영향평가 항목 중 10개에서 가장 낮은 영향을 미친다는 게 보고서의 골자다. 한마디로 플라스틱이 가장 친환경적이라는 얘기다.

친환경 빨대업계는 “LCA는 플라스틱이 유리할 수 있지만 플라스틱이 친환경적이라며 정책에 반영하는 나라는 한국뿐”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서경미 유신에코 대표는 “이번 연구에는 미세플라스틱, 해양 유입, 장기 독성 등 플라스틱 규제의 핵심 이유가 되는 환경영향이 평가 대상에서 아예 빠져 있다”며 “플라스틱 문제를 빼고 진행한 연구 결과에서 플라스틱이 유리하게 나왔다고 해서 플라스틱이 친환경적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종이 빨대를 조사한 방식 역시 논란이 되고 있다. 정진호 민영제지 대표는 “지난해 12월 기후부와 전과정평가학회가 연구 결과를 공유하는 자리에서 종이 상자를 샘플로 활용했다고 발표자가 언급했다”며 “이런 조사 결과를 정책 근거로 삼는 것은 친환경산업 전체를 왜곡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정부의 잣대가 달라졌다는 소식에 빨대 유통업계는 발 빠르게 중국산 저가 플라스틱 빨대 수입을 늘리고 있다. 컴포즈, 메가커피 등은 이미 중국산 플라스틱 빨대를 사용 중이다. 이들이 쓰는 중국산 빨대만 월 수억 개에 이른다.

식품 용기, 포장재 등 다른 일회용 플라스틱 제품도 규제의 칼날을 비켜나갈 것이란 관측이 제기된다. 서 대표는 “중국산에 밀려 기술을 축적하고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는 기회 자체를 박탈당해 국내 친환경산업이 붕괴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우려했다.

이정선 중기선임기자 leewa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