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마침내 모니터 밖으로 나와 우리 곁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 9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폐막한 세계 최대 IT·가전 전시회 ‘CES 2026’ 현장은 단순히 첨단 기술로 무장한 똑똑한 기기를 보여주는 자리가 아니었다. 똑똑한 ‘머리’만 있던 AI가 ‘팔다리’ 역할을 하는 하드웨어와 결합해 현실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피지컬 AI’ 시대의 완전한 개막을 알리는 무대였다.◇휴머노이드: 中의 로봇 굴기
전시회에서 가장 뜨거운 격전지는 휴머노이드 로봇이었다. CES 2026에 참가한 휴머노이드 전시 업체 총 38곳 중 중국 기업(21곳)이 55%를 차지할 정도로 중국의 로봇 굴기는 위협적이었다.
중국 유니트리는 양산형 휴머노이드 ‘G1’을 통해 로봇 대중화를 선언했다. 1만6000달러(약 2400만원)의 파격적인 가격을 앞세운 G1은 관람객과 복싱 대결을 벌이고, 넘어져도 오뚝이처럼 즉시 일어나는 민첩성을 보여줬다. 푸리에는 한층 개선된 보행 알고리즘을 적용한 ‘GR-2’를 공개하며 물류 창고나 제조 현장에 즉시 투입할 수 있는 실용성을 강조했다. 유비테크는 올 한 해 휴머노이드 5000대를 양산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발표했다.
중국 기업들은 하드웨어 부품의 90% 이상을 내재화해 확보한 가격 경쟁력과 전기차 시장에서 보여준 인해전술식 전략으로 시장 점유율 확대를 꾀하고 있다.
이에 맞서 현대자동차그룹의 보스턴다이내믹스는 차세대 아틀라스를 최초로 공개 시연해 기술 자존심을 지켰다. 아틀라스는 정해진 시나리오 없이도 내장된 시각 센서를 통해 주변 사물을 인식하고 최적의 동선을 스스로 계산해 부품을 옮겼다. 인간의 관절 범위를 뛰어넘는 360도 회전 관절 제어 기술은 한국의 ‘기술 초격차’를 세계에 각인했다. 아틀라스는 글로벌 정보기술(IT) 전문 매체 씨넷이 선정하는 베스트 오브 CES 2026에서 ‘최고 로봇상’을 받았다.◇모빌리티: 레벨4 자율주행의 현실화모빌리티 섹션에선 단순한 주행 보조를 넘어 완전 자율주행 경쟁이 치열했다. 자동차는 이동 수단을 넘어 달리는 피지컬 AI 컴퓨터가 돼 휴식과 업무가 가능한 제3의 생활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현대차는 구글의 자율주행 전문 기업 웨이모와 손잡고 아이오닉 5 로보택시의 최신 버전을 공개했다. 웨이모의 6세대 자율주행 시스템은 단순한 지도 데이터를 넘어 주변 보행자의 미세한 어깨 움직임을 보고 무단횡단 가능성을 예측해 미리 제동하는 수준까지 올라섰다.
아마존의 죽스는 운전석 자체가 없는 양방향 주행 로보택시로 관람객의 눈길을 끌었다. 죽스의 피지컬 AI는 전후방 구분이 없는 차체 구조를 활용해 좁은 골목에서도 회전 없이 방향을 바꾸고, 도심의 복잡한 물리 환경을 360도 전방위로 실시간 추론하며 주행할 수 있다.
엔비디아는 자율주행의 두뇌 역할을 하는 전용 칩 ‘토르’로 거대 생태계를 구축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이 칩으로 차량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피지컬 AI 플랫폼으로 탈바꿈시켰다.◇스마트홈: ‘집안일 0’ AI 동반자의 탄생
가전 분야에서는 AI가 집안의 집사를 넘어 가사 노동을 완전히 대신하는 ‘가사 해방’ 청사진이 제시됐다. LG전자가 야심 차게 공개한 홈 로봇 ‘클로이드’가 그 중심에 있었다. 클로이드는 집안 곳곳을 자율주행하며 정교한 양팔과 손가락을 활용해 젖은 수건을 집어 세탁기에 넣거나 건조가 끝난 빨래를 바구니에 옮기는 등의 동작을 수행했다. 사용자의 목소리 톤과 표정을 읽어 “오늘 힘들어 보이시네요, 편안한 음악을 틀어드릴까요?”라고 제안했다. LG전자는 기기 간 연결을 넘어 AI가 스스로 판단해 가사 노동을 ‘0’으로 만드는 ‘제로 레이버 홈(zero labor home)’ 비전을 현실화했다.
삼성전자는 ‘당신의 AI 일상 동반자’라는 새로운 비전을 선포했다. 삼성은 스마트싱스를 기반으로 한 ‘AI 홈’ 솔루션을 통해 사용자가 별도의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생활 패턴을 스스로 추론해 동작하는 맞춤형 솔루션을 선보였다.
거실에서 침실로 이동하면 조명과 온도가 자동 조절되는 것은 물론 갤럭시 등 최신 모바일 기기가 허브 역할을 하며 TV, 냉장고와 연동해 실시간 건강 상태를 체크하고 식단을 제안하는 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 AI가 단순한 도구를 넘어 사용자의 삶을 24시간 케어하는 ‘일상의 동반자’로 완전히 자리 잡았음을 보여줬다.◇의료: 진단 넘어 ‘치료’까지의료 분야에서는 AI가 데이터를 분석하는 진단을 넘어 인간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치료를 병행하는 수준까지 도약했다. 최고혁신상을 받은 한국 스타트업 에어플로는 아동 중이염 치료의 판도를 바꿨다. AI 센서가 귀 내부를 정밀 스캔해 염증 수준을 파악하면, 기기가 스스로 최적의 공기압과 진동을 발생시켜 삼출액을 배출한다. 웨이센은 AI 호흡기 셀프 스크리닝 서비스를 통해 실시간 물리 데이터로 환자의 중증도를 분류하는 기술을 선보였다.
지브레인이 선보인 뇌 질환 치료 시스템은 AI가 0.1초 만에 발작 전조 뇌파를 감지하면, 즉각적인 전기 자극을 보내 물리적으로 발작을 차단한다. 파킨슨병이나 간질 환자에게 피지컬 AI가 실질적인 ‘신체 일부’로서 기능하는 시대를 증명한 셈이다.◇금융·보안: 자동차가 된 지갑
금융 분야에선 AI가 ‘눈’(안면 인식)과 ‘뇌’(블록체인 인증)를 통합한 솔루션이 대거 공개됐다. AI 보안 스타트업 시바.AI는 자동차가 도로 위 물리적 공간에서 신원을 인증하고 바로 결제하는 솔루션을 선보여 주목받았다. 시바.AI의 ‘디지털 자동차’ 기술은 차량의 고유 식별 정보와 운전자의 미세한 행동 패턴, 그리고 생체 정보를 실시간으로 결합해 추론한다. 이를 통해 자동차가 드라이브스루나 주유소, 주차장에 진입하면 별도의 카드나 스마트폰 조작 없이도 AI가 알아서 확인해 결제한다. 국내 보안 기업 슈프리마와 안랩은 이기술을 ‘파이낸셜 패스포트’에 이식해 사용자가 차량에 탑승하는 동작만으로도 금융 인증이 완료되는 보안 환경을 시연했다. 결제 단말기 앞에서 사용자가 물건을 집는 물리적 궤적과 압력을 실시간 분석해 명의도용 여부를 원천 차단하는 방식이다.
허술한 보안을 틈타 개인정보를 빼내 악용하는 사례가 늘어나자 정밀 보안 시스템을 선보인 기업도 대거 참여했다. 이스라엘 밸리댓.AI는 카메라로 심장박동을 측정하는 기술을 공개했다. 얼굴에 있는 미세한 혈관 흐름을 포착해 시각 데이터만으로 진짜 사람인지, 딥페이크 영상인지 판단할 수 있다. 원격 영상으로 각종 금융상품에 가입하거나 공공기관과 기업 등에 회원으로 등록할 때 활용될 것으로 회사 측은 기대하고 있다.◇AI, 돈 버는 ‘실전 단계’ 진입CES 2026이 남긴 메시지는 AI가 이제 돈을 버는 실전 단계에 진입했다는 점이다. 지난 2년간 생성형 AI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탐색기였다면, 이제는 로봇·자율주행차·가전·의료기기 등 하드웨어와 결합해 실질적인 수익을 창출하는 상용화 단계로 들어섰다는 의미다. 산업의 승패는 누가 더 똑똑한 AI를 만드느냐가 아니라, 그 AI를 얼마나 안전하고 정교하게 인간의 삶 속으로 연결하느냐에 달렸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현대차그룹은 이번 전시에서 아틀라스의 2028년 상용화 계획을 구체화하며 로봇 경제의 서막을 알렸다. 우리 정부도 피지컬 AI를 중심으로 세계 3대 강국(G3) 도약을 선언하며 대규모 인프라 구축에 나섰다.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기술 패권의 무게중심은 단순한 지능 경쟁을 넘어 누가 실제 더 큰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느냐는 경쟁으로 이동했다”고 말했다.
라스베이거스=김채연 기자 why2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