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고환율이 보내는 경고

입력 2026-01-18 16:57
수정 2026-01-19 07:50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할 때다. 2018년 여름 미국에 갔는데 당시 원·달러 환율이 1100원대 초반이었다. 이후 환율이 1200원대로 뛰자 환전 때마다 스트레스가 컸다. 월세로 3000달러 가까이 냈는데, 환율이 100원 이상 오르는 바람에 앉은 자리에서 집세가 30만원 넘게 늘었다. 다른 생활비도 마찬가지였다. 원화를 달러로 바꿀 때마다 환율의 무서움을 실감해야 했다. 환율이 1500원에 육박하는 지금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인플레이션을 ‘소리 없는 월급 도둑’이라고 했는데, ‘월급 루팡’은 인플레이션뿐만이 아니다. 원화 가치가 떨어져도 월급이 소리 없이 사라지는 건 마찬가지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ECOS)에서 2000~2025년 평균환율을 계산해 보니 1162원이었다. 지금 환율이 1473원이니 원화 가치는 장기 평균보다 27%나 낮다. 그만큼 원화의 구매력이 줄었다. 원화를 달러 등으로 바꿔야 하는 해외 주재원이나 유학생 자녀를 둔 집은 직격탄을 맞고 있다.

비단 이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거의 모든 원자재를 수입하는 한국에서 고환율은 다른 어느 나라 못지않게 물가에 치명적이다. 국제 유가가 안정됐는데도 수입 물가가 작년 하반기 내내 상승한 게 단적인 예다.

이뿐 아니다. 한은은 고환율을 이유로 기준금리 인하를 사실상 접었다. 그동안 집값 때문에 기준금리를 내리기 어려웠는데 이젠 환율까지 통화정책의 발목을 잡았다. 시장금리는 벌써 꿈틀대고 있다. 주택담보대출 최고 금리는 약 2년 만에 연 6% 선을 넘었다. 중산층과 서민의 이자 부담이 커졌다.

지금처럼 1400원대 환율이 굳어진 건 굉장히 낯선 풍경이다. ‘국가 부도’로 한때 환율이 2000원 선을 위협한 1998년에도 연평균 환율은 1395원이었다. 지난해 평균 환율은 1422원으로 이보다 더 높았다. 1400원대 환율이 일상이 됐고, 1500원을 넘을 수 있다는 불안감마저 크다.

그렇다고 지금이 전 세계적으로 달러 강세인 상황도 아니다. 주요 국제통화 대비 달러 가치(달러인덱스)는 지난 1년간 오히려 8.8% 떨어졌다. 원화와 엔화 같은 몇몇 통화만 달러 대비 약세다.

원화 가치 하락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한·미 금리 차, 국민연금과 서학개미의 해외 투자 급증, 한·미 관세 협상에 따른 3500억달러 대미 투자 약속, 정부의 공격적 돈 풀기, 통화량 증가, 잠재 성장률 하락 등 수없이 많다.

가장 심각한 건 저성장이다. 한국보다 경제 규모가 17배 가까이 큰 미국이 매년 2% 안팎 성장하는데 한국은 2% 성장조차 버겁다. 한국에선 지난해 성장률이 1%를 넘겼느냐 마느냐가 쟁점이 될 정도다. 우리 경제의 기초 체력인 잠재 성장률은 10년 뒤 1% 수준으로 떨어지고 2040년대엔 0%대로 추락할 전망이다. 급속한 저출생·고령화로 일할 사람은 줄어드는데 부양인구는 늘어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관세를 무기로 세계의 공장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한국 기업도 앞다퉈 미국에 공장을 짓거나 짓기로 했다. 한국에서 괜찮은 일자리 구하기는 갈수록 어려워질 수 있다. 한국을 투자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고, 생산성을 높이고, 노동·복지 제도를 지속 가능하게 손질해야 하는데 말만 무성하고 행동은 별로 없다. 오히려 거꾸로 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들 때도 많다. 이렇다 할 외부 충격이 없는데도 환율이 위기 수준으로 굳어진 건 이런 불안 요인이 겹겹이 쌓인 결과다.

경제학에 ‘발로 하는 투표’라는 개념이 있다. 사람들이 공공 서비스와 세금 등을 따져 가장 선호하는 곳으로 이주하는 걸 말한다. 서학개미가 늘어난 건 그런 점에서 가볍게 봐선 안 될 신호다. 국내 개인은 지난해 미국 주식을 326억달러(약 48조원)어치 순매수했다. 2024년 105억4500만달러보다 세 배 이상 많다. 반면 유가증권시장에선 26조3600억원어치를 내다 팔았다. 올해도 개인의 ‘미장(美場) 매수, 국장(國場) 매도’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서학개미를 고환율 주범으로 몰아가는 건 단견이다. 한국의 성장 잠재력 하락이 문제의 핵심이다. 이걸 풀지 못하면 ‘코스피 5000’도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 있다. 고환율이 보내는 경고가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