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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그 사업계획서</h2>호찌민 타오디엔 거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보트 피플 미국인 기업가가 건넨 반도체 팹 사업계획서를 펼쳐볼 때, 머릿속에서는 웨이퍼·공정·수율이 춤췄지만 속으로는 생각했다. "이 나라가 정말 칩을 찍어낼 날이 올까?" 30년 가까이 가장 활발히 아시아 반도체 산업에 투자한 투자은행가로서, 당시 베트남은 아직 '가능성의 서류'에 가까웠다. 그 계획서는 야심 찬 꿈이었지만, 자본도 기술도 인력도 모두 물음표였다. 교통 신호도 없고, 보행자 길이 없는 호치민의 도로는 오토바이와 차로 넘쳐났다
그런데 2026년 1월 15일, 하노이 외곽 호아락 하이테크파크에서 군 산하 통신·기술 그룹 비엣텔이 베트남 최초의 반도체 제조공장 착공식을 열었다. 팜 민 찐 총리가 직접 참석한 이 자리에서 베트남은 "반도체 밸류체인 6단계 전체를 국내에서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선언했다. 27㏊(헥타르·1㏊=1만㎡) 부지의 이 팹은 32나노미터 공정으로 2027년 말 시험생산을 시작하고, 2028~2030년 공정 최적화를 목표로 한다.
10년 전 그 계획서가 지금은 국가 프로젝트가 되어 있었다.
32나노가 '구세대 기술'이라는 착각
삼성과 TSMC가 3나노, 2나노를 논하는 시대에 32나노라니. 누군가는 "10년 전 기술로 뭘 하겠다는 거냐"고 비웃을지 모른다. 하지만 반도체 시장을 제대로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안다. 최첨단 공정이 필요한 분야는 AI·스마트폰·데이터센터 등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동차, 산업설비, 의료기기, 사물인터넷(IoT), 항공우주 등 시장은 여전히 28나노에서 90나노 사이의 칩을 쓴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필요한 건 미세공정이 아니라 안정성, 내구성, 그리고 비용 효율성이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글로벌 기술 경쟁의 꼬리가 아니라, 막대한 수요가 있는 '미들 테크' 시장의 중심을 겨냥하고 있다.
더 중요한 건 이 팹이 단순 생산시설이 아니라는 점이다. 베트남 정부는 2030년까지 5만명, 2040년까지 10만 이상의 반도체 인력을 양성하겠다는 로드맵을 발표했다. 이 공장은 "국가 반도체 연구·설계·테스트·생산 인프라"이자 차세대 엔지니어를 배출하는 교육 허브다. 베트남은 칩을 만드는 게 아니라, 반도체를 '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고 있다.
군대가 칩을 만드는 나라
비엣텔은 베트남 국방부 산하 기업이다. 통신, 사이버 보안에 이어 이제 반도체까지. 군 조직이 첨단 기술 생태계를 주도한다는 게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1970~1980년대 한국을 떠올려보라. 포스코는 국가 주도 프로젝트였고, 삼성전자의 반도체 투자 뒤에도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다.
베트남은 지금 1980년대 한국이 걸었던 그 길을 2020년대 방식으로 재현하고 있다. 단, 속도는 두 배 빠르게, 스케일은 아세안 전체를 향해서다. 베트남 정부는 반도체 프로젝트에 투자금액의 최대 30%까지 보조하며, 이미 170개 이상의 외국인투자 프로젝트로 116억달러(약 15조원)를 유치했다.
따오 득 탕 비엣텔 회장은 "2027년 말까지 건설·기술이전·시험생산을 완료하고, 2028~2030년은 공정 최적화와 국제 표준 달성에 집중할 것"이라고 못 박았다. 이건 야망이 아니라 실행 중인 타임테이블이다.
한국 기업가에게 던지는 질문
10년 전 호찌민에서 내밀었던 그 사업계획서는, 당시엔 비현실적 야망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베트남 현실의 예고편이다. 그 사이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제조 국가가 됐고, 베트남은 32나노로 첫걸음을 뗐다. 겉으로 보이는 건 기술 격차다. 하지만 진짜 질문은 이거다.
베트남이 32나노 팹을 돌리기 시작할 때, 당신의 회사는 그 공장의 경쟁자입니까, 아니면 없으면 안 되는 파트너입니까?
5년 뒤 베트남이 16나노, 7나노로 올라섰을 때, 한국은 여전히 '베트남에 공장 가진 나라' 정도로만 기억되고 싶은가? 아니면 '없으면 밸류체인이 성립하지 않는 브릿지 국가'로 자리 잡고 싶은가?
3000개 이상의 글로벌 반도체 기업이 가입한 산업협회 SEMI는 2025년 11월 하노이에서 베트남 최대 규모 반도체 전시회를 열었다. 200개 기업, 5000명 이상의 업계 인사가 모였다. 미국, 유럽, 일본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 한국은?
질문을 바꿔보자.
베트남이 32나노 팹을 돌릴 때, 당신의 회사는 그 안에 들어가 있습니까, 아니면 밖에서 신문기사를 읽고 있습니까?
5년 뒤 베트남이 16나노로 올라섰을 때, 당신은 '협력 제안서'를 받는 쪽입니까, 아니면 '입찰 공고'를 보는 쪽입니까?
10년 뒤 베트남이 동남아 반도체 허브가 되었을 때, 한국은 '필수 파트너'로 기억될까요, 아니면 '경쟁국가'로 분류될까요?
당신은 지금 판 위에서 움직이는 플레이어입니까, 아니면 판 자체를 다시 깔고 있는 아시아 반도체 생태계의 설계자가 될 계획인가요?
10년 전 그 사업계획서에 답하는 시간이 왔다.
그리고 그 답은, 베트남 정부가 아니라 한국기업의 대표인 여러분이 써야 할 시간입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데이비드 김 테크 저널리스트·Asia Value Creation Awards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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