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 할 수 있는 검사 다 해주세요.”, “혹시 MRI 안 찍어봐도 될까요?”
요즘 진료실에서 많이 듣는 말이다. 이때 환자 손에는 대개 휴대폰이 들려 있다. 증상 발생 이후 오랜 시간 다양한 채널을 통해 수없이 검색하고 나서 진료실에 오는 환자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처음에는 정보를 얻고 싶어서였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안심을 구하는 마음이 더 커졌을 것이다. 이후 잔뜩 걱정 어린 표정으로 외래에 내원해 가장 빠른 해결책처럼 보이는 것을 먼저 제시한다. “바로 검사부터 해주세요.”
이런 환자 요구가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요즘 같은 시대엔 너무 자연스럽다. 문제는 검색의 결과가 ‘확률’이 아니라 ‘자극’으로 정렬될 때가 많다는 점이다. 흔한 원인보다 무서운 원인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설명보다 확신이 먼저 만들어진다. 그렇게 쌓인 확신은 오히려 진료실 대화를 가로막는다. 환자는 이미 결론을 갖고 있고, 의사는 그 결론이 왜 맞지 않는지 맥락을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환자가 진짜 원하는 건 진단명이 아니라 확인인 경우가 많다. 자신의 불안이 정당한지, 지금 안전한지 알고 싶어 한다. 불안할수록 그 검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검사는 분명 강력한 도구다. 필요한 순간엔 위험 신호를 놓치지 않게 해주고 치료 방향을 정해준다. 다만 검사는 불안을 0으로 만드는 마법이 아니다. 검사 결과는 늘 ‘정상 혹은 비정상’ 둘 중 하나로만 딱 떨어지지 않는다. 모호한 소견이 나오기도 하고 지금 증상과 직접 관련 없는 작은 소견이 우연히 발견되기도 한다. 그 한 줄이 또 다른 검사로, 또 다른 검색으로, 또 다른 걱정으로 이어지는 장면을 대학병원에서는 낯설지 않게 본다. ‘혹시’를 지우기 위해 시작한 검사가, 새로운 ‘혹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특히 이명과 어지럼 같은 증상은 이 같은 흐름을 타기 쉽다. 증상 자체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하루 컨디션에 따라 출렁이고 잠이 부족하거나 스트레스가 많은 날 더 크게 느껴질 수 있다. 불안이 커질수록 몸의 신호는 더 또렷해지고 그럴수록 불안은 더 심해진다. 그래서 어떤 환자는 검사를 하고 “큰 이상은 없다”는 말을 들어도 마음이 완전히 놓이지 않는다. 오히려 ‘정상’ 결과와 ‘여전히 불편한 몸’ 사이의 간격이 또 다른 불안을 만든다.
결국 우리가 진료실에서 다뤄야 하는 건 병뿐만이 아니다. 불확실성을 견디는 방식이다. 검사란 그 불확실성을 줄여가는 도구일 뿐 불안을 대신 꺼주는 리모컨이 아니다. 검사부터 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검사보다 먼저 ‘대화’로 불안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검사도, 치료도, 환자가 집으로 돌아가는 마음도 덜 흔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