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 시스템의 등장, 근대 국가의 시작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입력 2026-01-19 10:00
수정 2026-01-19 11:10

‘역참’으로 불리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은 고대 페르시아부터 중세 몽골제국까지 널리 사용됐지만, 오늘날 볼 수 있는 우편시스템의 직접적인 ‘조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근대국가의 주요 기반 중 하나인 근대 우편시스템은 신성로마제국에서 시작됐다. ‘데 타시스(de Tassis)’라는 라틴어화된 성으로 더 잘 알려진 이탈리아의 타소 가문이 우편시스템 등장에 큰 역할을 했다.

타소 가문 내에서도 1459년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 지역의 코르넬로에서 태어난 프란체스코 타소는 이 시스템을 일군 핵심 인물이다. 그는 자기 가문이 베네치아에서 공화국에 우편 서비스를 제공하는 민간 기업인 ‘콤파니아 데이 코리에리(Compagnia dei Corrieri)’를 설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프란체스코 타소 가문의 다른 분파(산드리 가문)는 로마교황청에 유사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1489년, 프란체스코의 형인 이아네토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 1세의 우편 서비스 책임자가 됐다. 세기말에는 무상으로 우편 서비스를 시행한 보상으로 이아네토가 오스트리아 케른텐 지역의 광산과 봉토를 받았다.

하지만 가문의 사업을 다른 수준으로 높인 것은 프란체스코였다. 광산이 타소 가문의 중요한 수입원이긴 했지만, 타소 가문에게 두드러지는 부를 안긴 것은 우편 서비스였다. 프란체스코는 유럽 대륙 전역의 우편 서비스 조직 방식을 근본적으로 개혁했다.

프란체스코는 1490년에 우편 마차와 말을 교대하는 최초의 상설 우편 노선을 구축했다. 이 노선에서는 편지가 들어 있는 봉인된 가죽 가방이 릴레이식으로 전달됐다. 우편 마차가 밤에도 운행했기 때문에 이동 시간이 크게 단축됐다.

1501년 브루게에서 그는 막시밀리안의 아들인 미남공 필리프의 우편국장(Maistre et Capitaine de Postes)으로 임명됐다. 이는 일반적으로 범유럽 우편시스템 발전의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원래 프란체스코 타소는 기본적으로 민간 계약자로서 네덜란드와 부르고뉴에 있는 필리프의 영지 내 우편 서비스를 재편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1505년 젊은 공작이 배우자 후아나를 통해 카스티야(필리프 1세)의 왕이 된 직후, 프란체스코는 브뤼셀과 스페인의 주요 우체국과 스페인 남부 도시인 그라나다, 그리고 그 사이의 여러 프랑스 도시 간 우편 연결을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마지막으로 인스브루크를 중심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이 보유한 복합적이고 분열된 영토를 일괄하는 우편시스템을 구축했다. 1516년에는 합스부르크의 이탈리아 영지로까지 우편 서비스가 확장됐다.

1505년 합스부르크 가문과 계약한 프란체스코는 고품질 우편 서비스의 대가로 연간 1만2000플랑드르 리브르의 수당을 받았다. 당시 브뤼셀에서 출발한 우편물은 인스브루크에 5일 만에, 그라나다에는 15일(겨울에는 각각 6일, 18일) 만에 도착했다.

프란체스코 타소는 유능한 우편 사업가임을 증명해 1515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으로부터 새로운 영지와 팔츠 백작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의 가문은 막 귀족 신분으로 올라섰다.

프란체스코는 1517년 직계 후손 없이 사망했지만, 그의 뒤를 이어 조카 조반니 바티스타 타소가 가업을 계승했다. 타소 가문이 제공한 서비스는 계속 확장됐고, 지방정부와 다양한 협정을 펼치며 새로운 우편 노선을 개설하고 관리했다. 이를 통해 타소 가문은 수 세기 동안 우편 분야에서 준독점적 권한을 유지했다.

처음에는 국왕 등 통치자와 고위 관리에게만 제공하던 우편 서비스가 17세기 초엔 타소 가문이 정한 수수료를 낼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됐다. 타소 가문의 사업 범위는 더욱 확대됐다. 타소 가문의 위세는 17세기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가 모든 우편 업무를 점진적으로 제국의 특권으로 삼고 타소 가문에만 독점적으로 사업권을 부여한 것이다.

다른 귀족들에 대한 황제권의 우위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의 과실은 타소 가문이 차지했다. 1615년에는 제국 우편국장이라는 직책이 프란체스코의 후손인 라모랄 타소에게 주어졌다.

1624년에 타소 가문은 더욱 승격돼 제국의 남작(freiherren)이 됐다. 그 무렵, 귀족 신분에 관한 주장을 강화하고 독일 엘리트 계층과 더 잘 융합되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투른 운트 탁시스(Thurn und Taxis)’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고대 롱고바르드 혈통을 가진 밀라노 가문인 ‘델라 토레(della Torre, 탑이라는 뜻)’라는 이름을 추가했다.

1682년에 투른 운트 탁시스는 제국의 공(公)이 되었고, 1754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가장 배타적 정치기관인 제국의회에 가입했다. 중부 유럽의 우편 서비스에 대한 가문의 지배는 그 후 수십 년 동안 지속됐다.

가문의 우편 서비스 조직은 1866년 보오전쟁 중 프로이센군이 ‘투른 운트 탁시스’ 본부가 있던 프랑크푸르트를 점령할 때까지 존속했다. 시대 변화에 맞춰 타소 가문의 본사도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에서 1701년 브뤼셀로 옮겼고, 이후 프랑크푸르트로 이전했다. 우편시스템을 받아들인 신성로마제국이 1806년 멸망한 후에도 회사는 19세기 후반까지 계속 운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