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초유의 원화 구두개입…정부 "신규 외환규제 도입"

입력 2026-01-15 17:47
수정 2026-01-16 01:35

정부가 15일 원·달러 환율 상승세가 지속되면 새로운 거시건전성 규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원화를 달러로 환전하는 과정에 금융회사 부담을 높이는 방안 등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은 보도자료를 통해 “최근 원화 약세는 한국의 경제 펀더멘털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시장에 경고성 구두 개입을 했다. 미국 재무장관이 우리 외환시장에 구두 개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최지영 재정경제부 국제경제관리관(차관보)은 이날 정부세종청사에서 연 간담회에서 “환율 상승 기대에서 비롯된 국내 가(假)수요가 현재의 (고환율) 상황을 만들고 있다”며 “국내시장 복귀계좌(RIA) 등 다음달부터 시행하는 세제 지원 조치 효과가 미미할 경우 거시건전성 규제 조치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우선 금융회사를 대상으로 할 것”이라며 “금융회사에 대한 거시건전성 조치가 개인의 거래 행태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덧붙였다.

베선트 장관은 14일(현지시간) 자신의 X(옛 트위터)에 “최근 원화 약세는 한국의 견고한 경제 펀더멘털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구윤철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과 함께 논의했다”고 적었다. 구 부총리와 베선트 장관은 지난 12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양자 회담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 차관보는 베선트 장관의 발언과 관련해 “한·미 전략적 투자 이행 등 양국 경제협력에서 원화의 안정적 흐름이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은행은 이날 금융통화위원회를 열어 기준금리를 연 2.5%로 동결했다. 금통위는 통화정책방향 회의 의결문에서 ‘금리를 인하할 가능성’이라는 표현을 삭제했다. 이날 서울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오후 3시30분 기준)은 7원80전 내린 1469원70전에 주간 거래를 마쳤다. 올들어 처음 하락했다.환전비용 올리고 대미투자 속도조절…시장은 '미지근'
'베선트 약발'에도 다시 상승…원화 약세 추세 꺾기에는 한계한국 외환당국이 외화 건전성 조치 도입을 언급한 것은 개인·기업의 달러 수요가 과도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됐다. 미국 재무장관이 한국 외환시장을 향해 이례적으로 구두 개입에 나선 것은 올해 가동되는 대미 투자펀드가 차질을 빚을 가능성을 고려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미 공동 대응에 힘입어 원·달러 환율 오름세는 11거래일 만에 꺾였다. 하지만 기조적으로 원화 약세 추세로 전환됐다고 판단하기에는 이르다는 평가가 많다. ◇외환당국, 달러 환전 비용 높이나 최지영 재정경제부 국제경제관리관(차관보)은 15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긴급 브리핑을 열어 “금융회사를 겨냥해 과거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거시건전성 조치를 설계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2010년 정부가 도입한 선물환 포지션 규제, 외환 건전성 부담금, 외국인 채권 투자 과세 등 ‘거시건전성 3종 세트’도 거론했다. 최 차관보는 “당시 조치를 방향만 바꿔 적용하는 방식은 아닐 것”이라며 “금융회사를 대상으로 한 건전성 조치가 결과적으로 개인의 달러 가수요 행태를 바꾸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증권사와 은행 등 금융회사가 달러를 환전하는 과정에 더 많은 비용을 부과하는 형태의 규제를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부담은 개인에게도 전가될 수 있다. 달러 환전 비용이 올라가면 금융회사가 그 비용을 개인과 기업에 떠넘길 수 있어서다. 환전 비용 상승은 달러가 더 오르기 전에 확보하려는 가수요를 억제할 것이라는 판단이다. ◇韓, 대미투자펀드 속도 조절 가능성외환시장은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이 “최근 원화 약세는 한국의 경제 펀더멘털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사실상 우리 외환시장에 구두 개입한 발언에 대해서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베선트 장관 발언 직후 야간 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10원 가까이 급락했지만 주간 거래에선 낙폭을 상당 부분 회복했다. 이날 발언은 한국 외환당국이 원화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한 시장 개입 행위를 묵인한다는 메시지로 읽힐 수 있다. 최 차관보는 베선트의 발언에 대해 “미국에 구두 개입을 요청하지 않았다”면서도 “우리가 미 재무부에 ‘외환시장 변동성과 불안이 커지면 대미 투자 이행을 제한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전달했다”고 설명했다.

환율 오름세가 지속되면 2000억달러 규모 대미투자펀드의 투자 집행 속도를 늦추겠다는 의미다. 한·미 양국은 한국이 대미 투자 과정에서 외환시장 불안을 겪을 경우 대미 투자펀드 규모와 시기를 조정할 수 있다는 데 합의했다. 지난해 11월 발표한 한·미 정상회담 조인트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에 담긴 “대미 투자가 원화 가치가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등 시장 불안을 초래하면 한국은 투자와 투자 시점 조정을 요청할 수 있다”는 문구다. 베선트 장관도 이 점을 고려해 “대미 투자 협정이 미국과 한국의 경제 파트너십을 심화하고, 미국 산업 역량의 부흥을 촉진할 것”이라며 대미 투자가 차질 없이 진행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최근 일본 외환시장을 향해서도 구두 개입에 나섰다. 베선트 장관은 지난 12일 가타야마 사쓰키 일본 재무상과 만난 자리에서 “과도한 환율 변동성은 본질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외환시장 영향에 촉각금융시장에서는 베선트의 구두 개입이 원·달러 환율의 단기 급등을 억제하는 데 효과를 보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다만 외환시장이 이를 계기로 안정화 단계에 진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반론도 많다.

박상현 iM증권 상무는 “미국과 일본의 동시 구두 개입과 함께 거시건전성 대책 조치 발표 등으로 원화 약세가 단기적으로 꺾이는 흐름은 이어질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이 조치만으로는 강력한 달러 가수요 흐름을 억제하는 데는 한계가 뚜렷하다”고 말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 환율 상승은 단기적으로는 수급 요인, 중장기적으로는 늘어난 통화량과 낮아진 잠재성장률의 영향이 크다”며 “근본 원인을 해소하지 않은 채 단기 수급만 손본다고 환율이 안정되진 않는다”고 말했다.

이광식/김익환/남정민 기자 bume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