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더 이상 미래의 기술이 아니다. 이미 산업 전반에 깊숙이 들어와 의사결정과 커뮤니케이션의 작동 방식을 바꾸고 있다. 많은 이들이 AI가 인간을 대체할 것이라 말하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 AI는 인간을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판단을 더욱 정교하게 만드는 도구에 가깝다. 방대한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고 패턴을 찾아내는 데 있어 AI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지만, 그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선택으로 이어갈지는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결과적으로 속도와 효율은 비약적으로 높아졌지만, 커뮤니케이션의 본질까지 바뀐 것은 아니다.
커뮤니케이션의 중심에는 여전히 신뢰가 있다. 오히려 허위 정보와 과잉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일수록 신뢰는 기업이 가진 가장 강력한 자산이 된다. 정보가 넘쳐날수록 사람들은 더 많이 믿을 수 있는 출처를 찾게 되고, 브랜드 역시 얼마나 자주 노출되느냐보다 어떤 맥락에서, 어떤 신뢰를 전제로 기억되는지가 중요해진다. 이제 경쟁은 누가 더 많이 노출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더 신뢰받을 만한 존재로 인식되느냐의 싸움이다.
이 지점에서 ‘Earned Influence’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이는 비용을 통해 단기간에 확보하는 영향력이 아니라, 시간과 일관성을 통해 신뢰를 축적하며 만들어지는 영향력이다. 특히 생성형 AI 환경에서는 이 차이가 더욱 분명해진다. 정보는 더 이상 검색 결과를 통해서만 소비되지 않는다. 생성형 엔진이 다양한 출처의 정보를 종합하고 해석해 하나의 답변으로 재구성하는 구조로 바뀌면서, 브랜드와 기업은 단순한 노출 경쟁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문을 마주하고 있다. 기업과 브랜드는 기존의 SEO 논리에서 벗어나 GEO라는 새로운 과제 앞에 서 있다. 이제 관건은 특정 키워드를 얼마나 많이 배치했는가가 아니라, AI가 판단하기에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 정보인가다. 맥락이 분명하고, 사실에 충실하며, 반복적으로 인용할 만한 콘텐츠인가가 핵심 기준이 된다. 커뮤니케이션의 목표 역시 검색 상단을 차지하는 데서 벗어나, AI가 선택해 반복적으로 인용하는 브랜드가 되는 것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것이 AI 시대의 ‘Earned Influence’이며, 브랜드 경쟁력의 새로운 기준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커뮤니케이션 업계 역시 감각과 경험에 의존하던 영역에 데이터와 예측이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여론의 흐름을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메시지의 반응을 사전에 테스트하며, 위기 가능성을 예측하는 일까지 가능해졌다. 그 결과 의사결정의 질은 분명히 높아졌지만, 동시에 AI가 모든 해답을 대신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도 커지고 있다. 그러나 공감과 윤리, 진정성 있는 스토리텔링만큼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팩트를 나열하는 것과 맥락을 이해하는 일은 다르고, 정보를 전달하는 것과 신뢰를 형성하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수치와 데이터는 설명할 수 있지만, 공감과 윤리, 진정성까지 대신할 수는 없으며, 바로 이 지점에서 신뢰는 만들어진다. 기술의 정밀함이 인간의 통찰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순간, 남는 것은 효율적으로 생산된 불신뿐이다.
기술이 앞서간다고 해서 신뢰가 자동으로 따라오지는 않는다. 결국 AI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신뢰가 기술이 아니라 사람과 조직, 그리고 리더십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어떤 데이터를 선택하고, 어떤 기준으로 활용하며, 어떤 메시지를 세상에 내놓을 것인지는 조직의 가치관과 리더십을 그대로 드러낸다. 커뮤니케이션은 분명 더 빨라졌다. 하지만 신뢰를 쌓는 속도는 여전히 느리다. 그리고 그 느린 과정을 견디며 일관성을 유지하는 힘, 그것이야말로 AI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가장 확실한 경쟁력이다.
글 정현순 버슨 아시아 태평양 지역 총괄 대표(Asia-Pacific C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