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과 EPC의 조합, 미래 불확실성 줄인다

입력 2026-02-02 06:00
[한경ESG] 스페셜 리포트 - 탄소감축을 위한 인센티브 ‘EPC’ ③·끝



지난 기고를 통해,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같은 미래산업이 탄소중립의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미래의 감축 성과를 앞당겨 보상하는 ‘EPC(Environmental Progress Credit)’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지만, 동시에 본질적이고 날카로운 질문이 뒤따랐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불확실한 미래 약속을 어떻게 믿고 현재의 돈으로 바꿀 수 있는가?’

일견 맞는 말이다. 미래는 불확실하다. 기업이 “앞으로 10년간 이만큼 줄이겠다”고 약속한들 그 약속이 지켜질지, 중간에 기술이 실패하지 않을지, 혹은 그 데이터가 조작되지는 않을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이 불확실성의 안개를 걷어내지 못하면 EPC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EPC가 현실이 되려면, 불확실한 미래를 ‘신뢰할 수 있는 추정(Educated Guess)’으로 바꾸는 방법이 필요하고, 그 신뢰 위에 자본이 안전하게 흐르도록 만드는 금융 설계가 필요하다.

이번 호에서는 EPC라는 자동차가 실제로 달리기 위해 필요한 엔진과 안전벨트, 즉 데이터를 위변조 없이 검증하는 ‘블록체인’과 시장의 초기 위험을 분담해줄 ‘혼합 금융(Blended Finance)’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추정’은 죄가 없다, 문제는 ‘신뢰’다

EPC의 핵심은 ‘미래가치의 현재화’다. 기업이 “새로운 공정을 도입해 향후 10년간 매년 1만 톤을 줄이겠다”고 약속하면, EPC는 그 미래가치를 신뢰할 수 있는 추정을 통해 평가하고 오늘의 투자금으로 연결한다.

흔히 ‘추정’을 ‘대충 맞추는 것’으로 오해하곤 한다. 하지만 금융은 본래 추정의 산업이다. 신용평가사는 기업의 미래 상황을 추정해 등급을 매기고, 주식시장은 미래 현금흐름을 추정해 주가를 산정한다. 보험은 미래 사고 확률(추정)에 가격을 매긴다. 즉 추정 행위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 추정이 얼마만큼 설득력을 갖느냐, 다시 말해 ‘신뢰할 수 있느냐’다.

안타깝게도 현재 탄소시장은 주식시장만큼 신뢰가 없다. 우리는 이미 ‘그린워싱’의 쓴맛을 봤다. 서류상으로는 숲을 조성했다는데 실제로는 황무지였던 사례, 감축량을 중복으로 계산해 이곳저곳에 판매한 사례 등은 시장의 신뢰를 무너뜨렸다. 과거 실적(Ex-post)도 조작하는 마당에, 미래 성과(Ex-ante)를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결국 EPC의 성패는 ‘해당 추정을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 달려 있다. 사람의 도장에만 의존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크고 속도가 느리다. 우리에게는 중개인 없이도 데이터를 믿을 수 있는 ‘신뢰의 엔진’, 즉 블록체인이 필요하다.

신뢰의 인프라, 블록체인

흔히 블록체인을 코인 투기 수단으로 오해하지만, EPC 관점에서 블록체인은 ‘신뢰 인프라(Trust Infrastructure)’다. 블록체인의 본질은 ‘무신뢰(Trustless)’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이는 ‘누군가의 선의(Goodwill)를 믿을 필요조차 없게 만드는 기술’이라는 뜻이다. 중앙 서버 관리자의 양심이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시스템과 코드 그 자체로 검증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블록체인 장부는 관리자가 마음대로 고칠 수 없고, 참여자 모두 같은 내용을 실시간으로 공유한다. 이 기술이 EPC와 결합하면 합리적 추정의 근거가 되는 데이터들이 ‘의심의 대상’에서 ‘검증 가능한 사실’로 바뀐다. 생소한 블록체인 기술 용어를 EPC 관점에서 아주 쉽게 풀어보자.

① 오라클(Oracle): 현실과 디지털을 잇는 ‘진실의 문’
블록체인 장부는 한번 기록되면 고칠 수 없다. 훌륭한 기능이다. 그런데 만약 처음부터 ‘거짓 정보’가 기록된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공장의 탄소배출량을 측정하는 센서가 고장 났거나, 누군가 데이터를 엑셀에서 조작해 블록체인에 올린다면? 블록체인 안에는 ‘위변조 불가능한 거짓말’만 영원히 남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이 바로 ‘오라클(Oracle)’이다. 오라클은 현실 세계의 데이터(공장 굴뚝의 센서값, 데이터센터의 전력 사용량 등)를 블록체인이라는 디지털 세계로 안전하게 배달하는 ‘보안 트럭’과 같다. 사람이 수기로 입력하는 과정을 없애고, 센서에서 측정된 값이 암호화되어 곧바로 블록체인에 기록된다. 데이터가 생성되는 그 순간부터 장부에 적히는 순간까지 누군가 개입할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오라클이 지키는 ‘진실의 문’을 통과한 데이터만 EPC 발행의 근거가 된다.

② 생애주기 추적(Lifecycle Tracking): 돈의 꼬리
A 기업이 탄소를 감축했다며 크레디트를 발행해 B사에 팔았다. 그런데 B사가 몰래 C사에 또 판다면? 디지털 세상에서는 ‘복사+붙여넣기’가 쉬워 이런 ‘이중 계산(Double Counting)’ 문제가 발생하기 쉽다. 탄소시장의 신뢰를 갉아먹는 주범이다.

블록체인은 EPC가 태어나는 순간(발행)부터 누군가에게 팔리고(거래), 최종적으로 사용되어 사라지는 순간(상각·소각)까지 모든 ‘생애주기’를 투명하게 기록한다. 마치 지폐마다 고유 번호가 있어 위조지폐를 가려내듯, 크레디트 하나하나에 ‘디지털 꼬리표’가 붙는다. 이 이동 경로는 전 세계 누구에게나 공개되므로 “이 크레디트는 이미 B사가 사용했습니다”라는 사실이 시스템적으로 증명된다. ‘한 톤을 두 번 파는 시장’이 원천 봉쇄된다.

③ 아토믹 결제(Atomic Settlement): 동시 교환
가장 혁신적인 기능은 ‘아토믹 결제’다. 자판기에 돈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돈이 들어감과 ‘동시에’ 음료수가 나온다. 돈만 먹고 음료수를 안 주거나, 음료수만 받고 돈을 나중에 주는 ‘먹튀’는 없다.
블록체인의 ‘스마트 계약(Smart Contract)’도 마찬가지다. ‘감축목표를 달성하면 인센티브를 준다’는 약속을 코드로 짜 넣는다. 조건이 충족되는 즉시 크레디트와 돈이 ‘동시에’ 교환된다.

EPC는 ‘미래 성과’를 다루기에 계약 이행의 불확실성이 크다. 하지만 아토믹 결제를 도입하면 대금 지급이 밀릴 위험이나 약속한 크레디트를 주지 않을 위험이 사라진다. 사람의 ‘선의’에 기대지 않고, 시스템의 ‘강제력’으로 약속을 지키게 만드는 것이다.

이미 시작된 실험: JP 모건과 일본의 스테이블코인

이러한 기술적 상상력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글로벌 금융시장은 이미 탄소시장의 인프라를 블록체인으로 교체하고 있다.

예로, 키넥시스를 들 수 있다. 2025년 미국 최대 은행 JP 모건의 디지털 자산 플랫폼 키넥시스(Kinexys)는 탄소시장 레지스트리(등록부)를 토큰화하는 솔루션을 공개했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코인’이 아니다. 복잡하게 흩어진 탄소 크레디트 등록, 발행, 거래 과정을 블록체인 위에서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거래 속도는 높이고, 검증 비용은 낮추며, 투명성은 극대화한다. EPC가 다뤄야 할 방대한 탄소 데이터와 복잡한 정산 과정을 처리할 ‘고속도로’가 깔리고 있는 셈이다.

또 다른 사례는 일본 J-크레디트(Credit)다. 일본은 과감한 실험을 하고 있다. 자국의 탄소 크레디트인 ‘J-크레디트’ 거래 시스템에 블록체인을 도입하면서 결제 수단으로 엔화 연동 ‘스테이블코인(Stablecoin)’을 사용하는 모델을 추진 중이다. 왜 굳이 코인을 쓸까? ‘국경 없는 투자’를 위해서다. 해외 투자자가 일본의 지방자치단체나 중소기업의 감축사업에 투자하려면 복잡한 환전과 송금 절차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블록체인상에서 스테이블코인을 사용하면 세계 어디서든 클릭 한 번으로 일본의 감축사업에 투자할 수 있다. 기술을 통해 자국의 탄소시장을 ‘글로벌 자금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허브’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EPC가 지향하는 ‘글로벌 자본 유입’을 위한 모범 답안이다.

위험을 나누는 지혜, 혼합 금융

블록체인으로 데이터의 신뢰를 확보했다 해도 여전히 ‘재무적 위험’이 남는다. 기술개발이 실패할 수도, 정부 정책이 급변할 수도 있다. 민간 투자자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회피한다. 그렇다고 정부 예산만으로는 그 막대한 전환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바로 ‘위험 분담’을 통한 ‘디리스킹(De-risking)’ 전략이다. 쉽게 말하면 ‘이 시장의 안전벨트를 누가 먼저 깔아주느냐?’의 문제다. 누군가 먼저 위험을 감수하고 안전판을 깔아주어야 거대한 민간자본이 들어온다. PPPP(Public-Private-Philanthropic Partnership) 모델이다.

각자의 역할은 명확하다. 정부·공공(Public)은 룰과 제도를 만들고, 때로는 보증이나 세제 혜택을 통해 신용을 보강한다. 민간·금융(Private)은 안전해진 판 위에서 큰 자본과 실행력으로 기술을 확산하고 상용화한다. 자선·임팩트 자본(Philanthropic)은 초기에 위험을 먼저 감당해주는 ‘촉매 자본(Catalytic Capital)’ 역할을 한다.

① 왜 ‘선한 자본(Philanthropy)’이 중요할까?
흔히 자본을 ‘수익을 좇는 돈’으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수익률보다 ‘문제 해결’ 그 자체를 중요시하는 돈이 존재한다. 빌 게이츠의 ‘브레이크스루 에너지(Breakthrough Energy)’, ‘베이조스 어스 펀드’, ‘록펠러 재단’ 같은 곳이 대표적이다. 이것이 바로 ‘선한 자본’이다. 이들은 시장이 아직 열리지 않아 민간자본이 들어오기를 꺼리는 영역에 가장 먼저 들어간다. 프로젝트의 가장 위험한 초기 단계에 참여해 ‘사업이 실패하면 내 돈부터 까라. 대신 성공하면 민간 투자자들이 수익을 가져가라’는 식으로 길을 만들어준다. 이들이 리스크의 가장 앞 단을 막아주면, 수익성을 따지는 민간자본이 안심하고 들어올 수 있다. EPC는 이 선한 자본이 마중물이 되고, 정부가 뒤를 받쳐줄 때 비로소 작동할 수 있다.

② 정부와 민간의 역할 분담
선한 자본이 길을 트면, 정부는 정책적 보증으로 그 길을 단단하게 다진다. ‘이 프로젝트에서 나온 EPC는 정부가 인증한다’는 도장을 찍어주거나, 세제 혜택을 통해 수익성을 보정해주는 식이다. 이렇게 안전해진 판 위에서 민간은 비로소 대규모 자본을 투입하고, 기술을 상용화하며, 시장을 키운다. 위험은 나누고, 각자의 강점은 합치는 구조다.

③ ‘선한 자본’이 만든 글로벌 성공 사례
? 기후 금융 파트너십(Climate Finance Partnership, CFP):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이 운용하지만, 그 구조를 뜯어보면 PPPP의 정석이다. 프랑스·독일·일본 정부와 휼렛 재단(Hewlett Foundation) 같은 자선단체가 선한 자본으로 참여한다. 이들이 전체 펀드의 약 20%를 맡아 ‘손실이 나면 우리 돈부터 먼저 제하라’는 안전판 역할을 해준 덕분에 나머지 80%를 기 투자자로부터 성공적으로 모집할 수 있었다.

? 브레이크스루 에너지 카탈리스트(Breakthrough Energy Catalyst): 빌 게이츠가 설립한 이 프로그램은 단순히 투자를 하는 게 아니다. 아직 너무 비싸서 시장성이 없는 기술(그린 수소, 장주기 ESS 등)에 대해 자선 자본이 ‘그린 프리미엄(가격 차이)’을 메워주는 역할을 한다. 가격 경쟁력을 갖춘 프로젝트에 블랙록, GM, 아메리칸항공 같은 민간기업이 참여다.

? GEAPP(Global Energy Alliance for People and Planet): 록펠러 재단, 이케아 재단, 베이조스 어스 펀드가 연합해 100억 달러 이상의 자금을 굴린다. 이들은 개발도상국의 재생에너지 프로젝트에 초기 자금을 대고, 이를 마중물 삼아 세계은행 같은 다자개발은행(MDB)과 민간자본을 끌어들인다.
이처럼 글로벌 금융은 이미 ‘위험 분담’을 통해 자본의 물꼬를 트고 있다. EPC가 지향하는 바도 이와 다르지 않다. 선한 자본이 마중물이 되어 리스크를 낮추고, 안전해진 판 위로 거대한 민간자본이 들어오는 구조가 바로 검증된 기후 금융의 ‘승리 공식’이다.

EPC, 정체된 탄소시장을 깨울 사회적 합의의 도구

지금까지 우리는 EPC를 실현하기 위한 2가지 핵심 조건, ‘신뢰의 기술(블록체인)’과 ‘위험을 나누는 자본(PPPP)’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엔진(기술)과 튼튼한 안전벨트(자본)가 있어도, 운전자가 어디로 갈지 합의하지 못하면 차는 출발할 수 없다. 사회적가치연구원 EPC팀이 지난 4년간 만난 90여 개 기관의 목소리는 한결같으면서도 엇갈렸다. 모두가 ‘탄소감축의 시급성’에는 깊이 공감한다. 하지만 정작 ‘그래서 당장 누가 비용을 대고, 누가 불확실한 리스크를 떠안을 것인가?’라는 현실적인 질문 앞에서는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정부는 실패하지 않을 ‘확실한 정책적 방법’을 찾느라 신중을 기하고, 기업은 나 홀로 앞서가다 겪게 될 ‘경쟁력 저하’를 우려해 계산기를 놓지 못한다. 금융권 또한 투자 대비 ‘수익의 가시성’이 확보될 때까지 자금 집행을 유보하고, 환경단체는 기업의 선언이 실질적 이행으로 이어질지 ‘진정성’을 검증하느라 날을 세운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정작 혁신의 열쇠를 쥔 기후테크 기업들은 애가 탄다.

EPC는 이 오래된 망설임을 깨뜨릴 ‘새로운 방법론’이다. 미래 성과를 현재의 가치로 인정해주는 ‘선(先) 보상’ 구조를 제안함으로써 서로 눈치만 보던 이해관계자들이 안심하고 시장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돕는 마중물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기술과 자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난해 상반기 우리가 확인한 결론은 명확했다. EPC가 연구원을 넘어 세상 밖에서 작동하려면 ▲제도의 뒷받침(수요)과 ▲실제 성공 사례(track record),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단단한 합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결국 EPC는 단순한 금융상품이 아니다. 탄소감축을 부담스러운 ‘비용’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갈 새로운 ‘성장 기회’로 바라보자는 거대한 ‘사회적 어젠다’다. 이제는 각 부처와 산업계, 환경단체가 한자리에 모여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따뜻한 합의의 토대 위에서 기술(블록체인)과 자본(PPPP)이 만날 때, 비로소 우리는 기후 위기라는 정해진 미래를 희망으로 바꿀 수 있다.

정명은·허승준·고민정·이택준 사회적가치연구원 연구원

사회적가치연구원
SK그룹이 2018년에 설립한 비영리재단법인. 기업의 사회(환경)적가치 활동이 기업의 자산가치로 인정받는 시장 메커니즘을 구상하는 연구를 수행 중이다. 이를 위해 사회·환경문제 해결 성과의 화폐적 측정방법론 개발, 보상 실험, 회계 연구, 정부 정책 및 거래 제도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