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7일 중국 관영 CCTV는 한 남성이 후드를 쓴 채 수갑을 차고 연행돼 비행기에서 내리는 장면을 방영했습니다. 캄보디아의 악명 높은 프린스그룹 창업자 천즈(38)였습니다. 아시아 최대 스캠 제국을 운영한 혐의를 받는 그는 전날 캄보디아에서 체포돼 중국으로 송환됐습니다.
천즈는 푸젠성 출신으로 PC방 관리자 출신에서 억만장자로 변신한 입지전적 인물입니다. 2015년 설립한 프린스그룹은 10년 만에 30개국 이상에서 부동산, 금융, 항공, 호텔업 등 100개 넘는 사업체를 운영하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천즈는 20억 달러 규모의 부동산 투자 덕에 캄보디아 ‘오크냐’(공작) 작위와 총리 경제특별고문직까지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의 실체는 로맨스 스캠 사기집단이었습니다. 지난해 한국인 피해자 감금 소식으로 떠들썩했던 바로 그 조직입니다. 미국은 그의 비트코인을 몰수했다천즈는 중국으로 송환됐지만 앞서 지난해 10월 미국 법무부는 그를 전신사기 및 자금세탁 공모 혐의로 기소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미국은 천즈의 비트코인 12만7271개(약 150억 달러)를 압수했다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미국 사법 역사상 최대 규모의 암호화폐 몰수였습니다. 같은 날 미국과 영국은 프린스그룹 관련 146개 개인·법인에 제재를 가했고 한국도 11월 독자 제재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중국 의존도가 높은 캄보디아는 천즈를 끝내 중국에 넘겨줬습니다. 38년 집권했던 독재자 훈센 전 총리와 그 아들 훈마넷 현 총리는 친중 정권을 이끌어왔습니다. 중국은 캄보디아 최대 투자국이자 무기 공급국입니다. 반면 미국과는 범죄인 인도 조약도 없습니다. 미국 송환 가능성은 사실상 없습니다. 중국 매체는 천즈가 중국 국적을 포기하려 해도 국내에서 먼저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선을 긋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백날 기소하고 제재를 해도 천즈 본인을 잡아갈 수는 없는 미국이 그의 비트코인은 어떻게 압수했던 걸까요? 5년 전 사라진 비트코인
중국 측 설명은 미국의 발표와 사뭇 다릅니다. 중국 정부기관인 국가컴퓨터바이러스긴급대응센터(CVERC)는 지난해 11월 9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미국이 2020년에 이미 해킹으로 천즈의 비트코인을 가져갔다고 발표했습니다. 2025년 기소는 그 ‘절도’를 합법화하는 절차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보고서를 보면 2020년 12월 29일 천즈가 소유한 채굴장이 대규모 해킹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때 가격으로 35억 달러어치의 비트코인 12만7272개가 단 2시간 만에 사라졌습니다. 이곳은 당시 세계 6위 규모의 비트코인 채굴장이었고 이 공격으로 보유 자산의 90% 이상을 잃었습니다.
천즈는 다급해졌습니다. 2021년 초와 2022년 7월 그는 1500건 이상의 메시지를 발신하며 거액의 보상금을 약속했습니다. “협상하겠다. 돈을 돌려달라”는 호소였습니다. 응답은 없었습니다.
기이한 것은 이후 상황입니다. 해킹당한 비트코인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대개의 해커라면 거액을 훔치는 데 성공했으니 즉시 현금화를 시도했을 것입니다. 이리저리 분산시키고 다시 섞어 출처를 못 찾게 만들고, 이 작업을 반복하다 신원 확인이 느슨한 거래소를 통해 현금으로 찾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이 자금은 마치 얼어붙은 듯 3년 반 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2024년 6~7월이 되자 비트코인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 목적지를 궁금해할 때 블록체인 분석기업 아캄인텔리전스가 놀라운 답변을 냈습니다. 자금이 도달한 지갑은 미국 정부가 보유한 지갑이었습니다.
중국 CVERC 보고서는 이 같은 흐름이 급히 현금화하려는 일반 해커의 행태와 맞지 않다고 분석하고 개인키 생성 알고리즘 등 기술적 정밀함을 볼 때 ‘국가급 해커 조직의 특성’을 띤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기소장이 말하지 않는 것한편 미국 법무부의 기소장은 25페이지에 걸쳐 천즈의 범죄 시설이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 어떤 방식으로 운영했는지, 코인은 어떻게 세탁했는지 등을 상세히 기술합니다. 기소장 끝에는 몰수 대상 비트코인 지갑 주소 25개가 나열돼 있습니다.
그러나 기소장 어디에도 미국 수사당국이 이 지갑들의 비트코인을 어떻게 몰수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비트코인은 개인키 없이는 이동이 불가능합니다. 천즈가 자발적으로 키를 넘겼거나, 측근이 넘겼거나,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취득했거나 등 추측을 해보지만 미국 정부는 어떤 설명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블록체인 분석기업 엘립틱은 “해당 비트코인이 어떻게 미국 정부의 통제하에 들어왔는지 불분명하다. 애초에 ‘도난’이 실제로 발생했는지조차 불확실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중국 관영매체들은 미국 측이 불법적 수단을 동원했을 거라고 봅니다.
물론 중국 측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중국이 가장 원치 않았던 것은 천즈가 미국 사법 당국에 넘어가는 것이라는 관측도 있습니다. 중국 관리들의 연루 의혹이 미국 법정에서 드러나기 전에 천즈를 확보하려는 동기가 있었다는 해석입니다.
미국과 중국의 신경전 속에 정작 수천 명 피해자들은 잊혀지고 있습니다. 미 재무부는 동남아 기반 스캠으로 인한 미국인 피해액은 2024년 한 해만 100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합니다. 전년 대비 66% 증가했습니다. 유엔은 캄보디아에서만 10만 명 이상이 강제로 온라인 사기에 동원되고 있다고 봅니다. 이론적으로 미국이 압수한 150억 달러어치의 비트코인은 많은 피해자들을 구제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미국 정부 지갑에 그대로 있습니다. 비트코인은 안전한가지난 1월 3일 미국은 베네수엘라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체포해 뉴욕으로 이송했습니다. 그러자 베네수엘라 마두로 정권이 60만 개의 비트코인을 보유하고 있다는 소문과 함께 그것도 미국이 압수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왔습니다.
베네수엘라의 비트코인 보유가 사실인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만약 그 비트코인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어떨까요? 천즈의 ‘선례’대로 미국 수사당국이 기소장에 지갑 주소를 나열하면 ‘압수’는 어떻게든 이뤄지고야 마는 것 아닐까요?
팍스아메리카나 이후 미국은 달러 결제망을 무기 삼아 적대국과 도전자들을 고립시키는 방식으로 역량을 과시해왔습니다. 또 달러를 찍어낼 수 있는 권한을 바탕으로 패권을 유지해왔습니다. 달러에 대한 도전으로 탄생했던 비트코인이 대안으로 부상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비트코인도 안전하지 않다면? 전부 미국의 손바닥 위에서 좌지우지되는 거라면? 비트코인 가치가 0이 되어도 사토시 나카모토는 할 말이 없을 겁니다. 미국의 압수 경위가 밝혀지기를 바랍니다.
김외현 비인크립토 동아시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