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만 보면 질투가 나. ‘K’라는 글자를 싹쓸이했잖아. K팝 K드라마 K바비큐…. 2025년이면 ‘KKK’(백인우월주의단체)도 ‘Korean, Korean, Korean’이란 뜻이 될 거야.”
미국 스탠드업 코미디언 앤드루 오롤포가 2022년 무대에서 던진 농담이다. 함의는 이렇다. 미국 중심의 문화 질서가 K라는 브랜드의 출몰로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데이터가 뒷받침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2010년부터 11년간 K콘텐츠 수출 규모는 약 네 배 성장했다. 넷플릭스는 회원 10명 중 8명이 한국 콘텐츠를 시청했다고 밝혔다. ‘오징어 게임’으로 시작해 ‘케이팝 데몬 헌터스’로 막을 내린 지난해 K콘텐츠는 오롤포의 말처럼 글로벌 주류 시장의 소비 기본값이 됐다.
양적 팽창에 성공한 K콘텐츠가 올해 질적 전환의 기로에 서 있다. 단순한 ‘수출 상품’을 넘어 전 세계가 자연스럽게 공유하는 ‘문화적 문법’으로 안착해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있다. 역설적으로 지속 가능한 K콘텐츠의 다음 도약점은 K라는 수식어를 떼어내는 데 있다. 한국어를 쓰거나 한국을 내세우지 않아도 기저에 ‘한국적 감각’이 스며드는 내재화 단계에 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 미술과 만화가 각각 19세기 인상주의, 21세기 애니메이션 창작의 표준이 된 과정이 그랬다. 인상주의 거장 빈센트 반 고흐는 편지에서 ‘내게 일본 미술은 고대 그리스 미술이나 옛 네덜란드 거장들과 같은 반열에 있다’고 적었고, 영화 ‘프랑켄슈타인’을 연출한 기예르모 델 토로는 “어린 시절 멕시코에서 본 콘텐츠는 다 일본 것이었고, 나는 일본 어린이나 마찬가지였다”고 언급했다. 일본적 요소가 문화적 원형으로 다듬어져 수십 년 뒤 창작자들 사이에서 글로벌 표준 제작 규범이 된 것이다.
K콘텐츠 내재화의 신호탄은 넷플릭스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쏘아 올렸다. 해외 자본이 투입됐고, 한국계 캐나다인 감독이 영어를 활용해 제작했지만 그 세계관 뿌리가 철저히 K팝에 닿아 있다는 점에서다. 원산지 증명 없이 ‘K신드롬’을 일으킨 상징적 모델이 됐다. 유형의 지식재산권(IP) 수익은 없지만, 무형의 경제·외교적 가치는 측정 불가능할 정도다. 사상 최대치를 기록한 지난해 외국인 방한 관광객 수(약 1850만 명)와 국립중앙박물관의 ‘뮷즈’(뮤지엄 굿즈) 열풍이 이를 보여준다.
이 작품을 연출한 매기 강 감독은 “진정한 의미의 K콘텐츠 글로벌화를 이루려면 한국 문화에 공감하면서도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글로벌 창작자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속 가능한 K콘텐츠 생산을 위해 제작 시스템의 저변을 해외로 넓히는 인적·물적 침투가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K콘텐츠는 ‘한국에서만 만들 수 있다’는 인식적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내재화의 가능성은 지난해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국내에선 영화시장 침체 등의 영향으로 흥행 부진을 겪었지만, 베니스국제영화제 등 해외에선 호평받았다. 이 영화는 200개국에 개봉 전 선판매돼 170억원의 제작비를 회수하며 손익분기점(BEP)을 넘겼다. 한국 관객만 타깃으로 삼지 않고, 기획 단계부터 한국적 감수성에 글로벌 보편성을 결합한 결과라는 평가가 나온다.
학계에서도 ‘K’의 고유성을 문화적 원형으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K콘텐츠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고, ‘문화적 소수’의 입장에서 독특함으로 승부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이유에서다. 강보라 연세대 커뮤니케이션연구소 전문연구원은 “지식재산권(IP)을 확보해야 한다는 당위적 얘기를 벗어나 중장기적으로 K콘텐츠를 전 세계가 어떻게 소비할 것인지 논의해야 할 시점”이라고 했다. 이어 “K콘텐츠가 한국에서 해외로 나가고, 해외에서 새로운 K콘텐츠가 만들어져 또 다른 지역에서 소비하는 순환적 고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