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 애니멀’(경제 동물). 1980년대 서구 사회에서 일본인을 부르던 멸칭이다. 세계 2위 경제 대국에 오른 일본을 경계하며 ‘경제 성장에만 매몰돼 문화적 소양이 부족한 국가’라는 프레임을 씌운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일본에 대한 인식은 정반대다. 경제 규모는 4위로 떨어졌지만 소프트파워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광적인 일본 문화 ‘오타쿠’들이 전 세계에 포진해 있을 정도다. 이 같은 막대한 문화 자산은 일본이 장기 침체에도 선진국 지위를 유지해온 원동력 중 하나가 됐다.
전성기를 맞은 K컬처에도 일본과 같은 기회가 열려 있다. 지금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한국 문화의 유행을 문화 자산으로 축적할 수 있다면, 한국이 국제 사회에서 중견국(미들파워)의 허브로 굳건히 자리 잡는 것도 시간문제다. K컬처의 현주소를 일본의 사례와 비교 분석하고, 전문가들과 관련 기관의 조언을 받아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정리했다. 차별화된 문화로 ‘K브랜드 전성시대’문화는 그 나라에서 생산되는 모든 제품에 대한 보증서 역할을 한다. 경제 상황이 나빠져도 국가 브랜드를 지탱해주는 강력한 보험인 셈이다. 예컨대 일본은 선(禪) 사상에서 유래한 자연스러운 미니멀리즘 양식인 ‘젠(Zen) 스타일’, ‘장인 정신’이라는 미학적 가치를 세계에 각인시켰다. 이는 “일제 제품은 정교하고 신뢰할 수 있다”는 인식으로 이어졌다.
한국 역시 K팝과 드라마의 인기를 바탕으로 식품, 뷰티 등 연관 산업에서 강력한 후광 효과를 누리고 있다. 한국수출입은행의 2022년 보고서에 따르면 K콘텐츠 수출이 100만원 증가할 때 소비재 수출은 약 180만원 증가했다. 이기원 한국푸드테크협의회 공동회장(서울대 식품생명공학과 교수)은 “과거와 달리 넷플릭스, 아마존 같은 글로벌 플랫폼이 등장해 한국 문화가 북미, 유럽까지 널리 퍼질 수 있게 됐다”며 “한국식 식문화 자체가 유행하면서 여러 소비재 기업의 수출이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다만 한국 문화 유행의 역사는 일찌감치 전 세계에 자국의 콘텐츠와 문화를 전략적으로 퍼뜨려온 일본에 비해 짧은 편이다. 예컨대 일본은 20세기 후반부터 일식 홍보와 세계화에 힘썼고, 2013년 자국의 식문화를 뜻하는 ‘와쇼쿠’(화식)를 유네스코 무형유산에 등재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전 세계 일식당은 2013년 5만5000개에서 2023년 18만7000개로 10년 만에 240% 증가하며 세계인의 식생활에 안착했다. 반면 한국의 K푸드는 아직 ‘세련된 유행’ 수준에 머물러 있다. 미국 내 아시안 식당에서 한식당이 차지하는 비율이 6%에 불과한 게 이를 방증한다. 중국(39%)과 일본(28%)은 물론 태국(11%), 베트남(7%)보다도 아래다.
K컬처를 세계인의 생활 속에 더욱 깊이 침투시키지 못하면 연관 소비재 산업이 누리는 후광 효과도 떨어질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우려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최근 중국 ‘C뷰티’ 기업들이 막대한 중국 내수 시장, 낮은 가격을 내세워 K뷰티 제품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며 “문화 콘텐츠와 연계한 마케팅, 중국 화장품보다 우월한 기술력, 서구권 시장을 공략한 차별화된 전략을 보여줄 수 있어야 K뷰티가 C뷰티를 압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재미있는 유행에서 존경받는 브랜드로핵심은 K컬처를 일시적인 유행에서 신뢰할 수 있는 브랜드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1996년 출시된 일본의 포켓몬스터가 지난 30년간 거둔 수익은 1000억달러(약 142조원)를 훌쩍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롱런’의 비결 중 하나가 일본 대중문화 특유의 ‘탄탄한 세계관’이다. 세계관 내 캐릭터끼리 상호작용하면서 새로운 이야기와 관련 상품이 무궁무진하게 태어난다. 전 세계 지식재산권(IP) 수익 상위 50곳 중 일본 브랜드가 포켓몬스터(7위), 산리오(10위) 등 7곳이나 포진한 배경이다. 반면 한국 기업은 50위권에 없다.
탄탄한 세계관의 기본은 인문학적 깊이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등 관련 연구기관들이 보고서에서 “한류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대중문화의 성공이 기초 예술로 흘러 들어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꾸준히 강조하는 이유다. 예컨대 대중문화 수익의 일부를 순수 미술, 클래식, 인문학 비평 등에 지원하는 ‘문화 자산화 기금’ 운용 등이 구체적인 대안으로 거론된다. 기초 체력이 튼튼해야 유행이 끝난 뒤에도 브랜드가 남는다는 논리다.
국제 사회에서 존재감을 키워 ‘질적 영향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영국 브랜드 가치 평가 컨설팅 업체인 브랜드파이낸스에 따르면 2025년 기준 한국의 소프트파워 종합 순위는 12위다. ‘예술 및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는 7위에 올랐지만, 인류 전체의 가치에 대한 기여도를 뜻하는 ‘관대함’ 지표는 37위에 머물렀다.
“우리의 강점인 정보기술(IT) 경쟁력을 활용해 전 세계가 따르는 ‘문화적 질서’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대외경제정책연구원)는 지적도 나온다. 예컨대 인공지능(AI)으로 생성한 예술의 저작권 가이드라인, 디지털 아트(NFT 등) 거래 표준을 한국이 먼저 제시하고 국제기구의 의제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설명이다.
성수영/배태웅/이주현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