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출판 기업인 좋은책신사고의 홍범준 대표가 서울대에 1000억원이라는 거액의 기부금을 쾌척했다. 홍 대표는 서울대 수학과 출신으로, 국내 수학 참고서의 최고 베스트셀러인 ‘쎈수학 시리즈’ 저자이기도 하다. 1000억원의 기부금은 국내에서 개인이 대학 등에 낸 단일 기부금으로 역대 최고 규모다.
홍 대표의 기부가 주목받는 것은 단순히 규모뿐만 아니라 기부 취지 또한 남다른 데 있다.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와 수학 부문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 수상자를 배출할 수 있는 연구 환경을 만드는 데 써 달라는 것이다. 이번 기부금으로 조성되는 연구기금의 이름 또한 ‘발칙한 자연과학적 상상과 수리 논증을 위한 무주·쎈 연구기금’이다. 무주(無住)는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홍 대표의 불교적 인생관에서, ‘쎈’은 그의 수학 참고서 시리즈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연구 기금명에도 들어 있는 ‘발칙한 자연과학적 상상’은 독창적, 선구적 연구 과제를 의미한다. 당장 몇 년 안에 성과를 보려는 단기 과제가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매달려야 하는 평생의 과제다. 이를 위해서는 연구자들이 안정적인 환경에서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재정적 지원이 절실하다. 미국 하버드대는 헤지펀드 매니저 존 폴슨, 칼텍은 억만장자 기업가이자 자선사업가인 레스닉 부부의 막대한 기부금 등을 재원으로 기초과학 분야에서 선도적 연구 업적을 내고 있다. 일본이 미국 다음으로 많은 27명의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낸 원동력 또한 수십 년간 한 우물만 팔 수 있도록 한 장기투자에 있다. 일본 정부와 기업들은 기초과학 연구 결과가 산업계에 활용되는 데 길게는 100년 이상 걸릴 것을 알고도 아낌없이 거액을 지원하고 있다.
전국 의대 정원이 다 채워진 다음에서야 서울대 공대, 순수과학 학과인 게 현실이다. 기초과학과 이공계 살리기는 단순히 말로만 부르짖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홍 대표와 더불어 KAIST(500억원)와 서울대(250억원)에 AI 대학원을 후원하고 있는 김재철 동원그룹 명예회장 같은 통 큰 기부자들이 계속 나올 수 있도록 정부는 공익재단 관련 세제 개편으로 화답할 필요가 있다. 대학도 혁신으로 답해야 함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