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니 ASML 나오지'…네덜란드가 보여준 '9%의 기적' [강경주의 테크X]

입력 2026-01-14 07:04
수정 2026-01-14 14:42

지난해 10월23일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경쟁력 확보를 위해 2030년까지 '슈퍼 을(乙)' 프로젝트를 통해 '한국형 ASML'을 육성하겠다"고 발표하자 국내 반도체 현장에선 "말뿐인 구호에 그칠 것"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2024년 8월20일 당시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발표한 '슈퍼 을' 프로젝트의 재탕이라며 구체적인 세제 혜택과 같은 디테일이 빠졌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K소부장' 육성을 위해선 'ASML' 자체보다 'ASML 공급망'을 만든 금융 정책과 혁신 시스템에 주안점을 둬야한다고 네덜란드 현지에선 입을 모았다.

네덜란드 정부는 세제 혜택, 혁신 펀드, 금융 지원을 통해 중소기업과 하이테크 기업을 적극 지원한다. 체르크 옵메르 네덜란드 경제부 국장은 14일 "하이테크 산업에서 중요한 것은 기업의 크기가 아니라 얼마나 빠르게 협력할 수 있느냐"라며 "중소기업이 주도하는 네덜란드 모델은 기술 경쟁력과 산업 지속가능성을 동시에 높이는 구조"라고 입을 열었다. 실제 네덜란드 하이테크 산업의 가장 큰 특징은 대기업 중심이 아닌 중소기업(SME) 주도형 구조에 있다. 네덜란드 전역에는 약 8만7000개의 하이테크 관련 기업이 활동하고 있으며, 이들이 고용한 인력만 50만 명에 육박한다.

옵메르 국장은 구체적인 세제 정책을 설명했다. 그는 "기업이 선호하는 '혁신박스' 제도는 기업이 자체 개발한 특허나 혁신 제품에서 발생한 이익에 대해 법인세율을 일반 25.8%가 아닌 9%로 대폭 낮춰 적용한다"며 "연구개발(R&D)에 성공할수록 세 부담이 줄어드는 구조"라고 강조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여기에 'R&D 세액공제 제도'(WBSO)를 통해 인건비, 자재비, 프로토타입 제작 비용 등 R&D 관련 비용의 최대 40%까지 과세소득에서 공제할 수 있도록 했다.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은 더 높은 공제율이 적용된다.

금융 지원도 촘촘하다. 담보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을 위해 정부가 은행 대출을 보증하는 '중소기업 신용보증제도'(BMKB)가 운영되고 있고, '성장기금'을 통해 벤처캐피탈(VC)이나 사모펀드(PE)가 중소기업에 투자할 때 정부가 일부 위험을 분담한다. 옵메르 국장은 "혁신대출은 혁신적인 제품·공정·서비스 개발 기업을 대상으로 한 저리 대출로,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에 따라 상환 조건을 유연하게 조정한다"며 "최소 두 개 이상의 중소기업이 참여하는 공동 R&D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SME 혁신 촉진 프로그램은 AI와 첨단 기술, 지속가능 분야를 우선 지원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설명했다.

네덜란드 혁신 클러스터 '브레인포트'의 나오미 베르스트라텐 최고혁신경영자(CIO)는 강소기업 생태계의 근간인 '트리플 헬릭스' 모델을 언급했다. 그는 "트리플 헬릭스는 정부와 대학, 기업이 수평적 파트너로 협력하며 R&D부터 사업화까지를 하나의 생태계로 묶는 혁신 플랫폼"이라고 말했다. 이 구조에서 정부는 방향을 설계하고, 대학·연구소가 원천기술을 축적하며 기업이 산업과 시장으로 연결한다.

예를 들어 TNO 같은 연구기구는 중장기 로드맵을 짜고, 대학은 이를 뒷받침할 인력과 원천기술을 공급한다. 베르스트라텐 CEO는 "ASML, NXP, VDL-ETG처럼 세계를 장악한 기업이 공급망의 수백 개 중소기업과 공동으로 개발과 실증을 진행하고 연구기관은 이들이 기술적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도록 상시 공동연구를 수행한다"고 밝혔다.

기술사업화 관점에서도 트리플 헬릭스는 명확한 역할 분담과 협업 시스템을 구축했다. 베르스트라텐 CEO는 "연구소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기업이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수준까지 성능과 신뢰성을 끌어올리는 '중간 기술 완성도(TRL)' 구간을 책임진다"며 "대학은 스타트업 스핀오프와 인력 공급을 통해 초기 시장을 넓히고 기업들은 실증 라인과 제조 역량을 제공해 연구 성과가 산업에 바로 흡수되도록 한다"고 했다. 그 결과 브레인포트는 네덜란드 특허 출원의 50%, 국가 전체 수출의 20%를 담당하고 있다.


에인트호번·엔스헤데=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