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로맨스 작가인 캐럴 스터커(레아 시혼)의 신작 낭독회. 팬들은 두 눈을 빛내며 소설 속 사랑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캐럴 역시 숨겨진 ‘떡밥’을 귀띔해주며 팬들을 즐겁게 한다. 하지만 행사가 끝난 직후 캐럴의 웃음은 완전히 사라진다. “내 작품은 쓰레기야. 저들도 그렇고.”
고향인 앨버커키로 돌아오는 길. 정체불명의 뭔가가 인간들을 덮친다. 세상이 망하길 바라던 불만투성이 캐럴. 하지만 세상을 구해낼 유일한 존재 또한 바로 그녀다.
SF 호러 코미디 <플루리부스 : 행복의 시대>는 애플티비가 극비리에 준비해온 야심찬 기획이었다. 시청자들의 기대도 대단했다. 범죄 드라마의 고전 <브레이킹 배드>(2008~2013), 그 스핀오프인 <베터 콜 사울> (2015~2022), <엘 카미노>(2019)의 제작자 빈스 길리건이 모처럼 새로운 세계관으로 선보인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베터 콜 사울>을 즐겁게 본 시청자라면, 부패한 변호사 지미(밥 오덴커크) 옆에서(때로는 앞장서서) 선과 악의 경계를 갖고 장난을 치던 변호사 킴(레아 시혼)을 잊지 못할 것이다. 뛰어난 연기에도 여러 시상식에서 외면받았던 배우 레아 시혼이 이번 <플루리부스>에서 주연을 맡았다는 소식은 팬들에게도 의미가 컸다. (최근 미국에서 열린 31회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에서 레아 시혼이 이번 작품으로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최근 시즌1을 종결한 <플루리부스>는 시청자들의 기대를 어느 정도 채운 것 같다. 지난해 11월 9부작의 도입부를 첫공개한 직후, 애플티비의 역대 최대 시청 기록을 경신하며 화제를 모았던 터다. 확실히 <브레이킹 배드>나 <베터 콜 사울>에서 느낄 수 있었던, 즐거운 긴장감과 호기심을 <플루리부스>의 도입부에서도 접할 수 있다.
외계에서 온 수상한 신호를 과학자들이 분석하면서 사건들은 시작된다. 이 신호는 누가 왜 보낸 것일까. 인류는 어떻게 될까. <플루리부스>는 불길한 분위기 속에서 서두르지 않고 하나씩 하나씩 질문을 던진다. 빈스 길리건은 전작에서도 그랬듯이 지루한 설명 따위는 하지 않으며, 오직 인물의 선택을 숨죽여 지켜보게 만든다. 답을 찾는 것은 시청자의 몫이다.
따라서 <플루리부스>를 온전히 즐기려면 아무 정보 없이 그냥 보는 게 낫다. 스포일러를 최대한 피하면서 조심스럽게 리뷰를 채우자면, 드라마의 도입부엔 잘 만든 좀비 호러 영화에서 느껴지는 쫀쫀함이 있다. 우리에게 공포를 주는 낯선 대상이 좀비도 괴물도 아니며, 신체를 강탈당한 존재도 아니라는 것이 더 섬뜩한 요소다.
주인공이 싸워야 하는 상대는 평범한 이웃이자 모든 인류다. 즉 빌런(악당)이 있긴 한데, 이 빌런이 다른 SF호러의 빌런들처럼 잔혹하거나 맹목적이지 않으며, 그 의도 또한 악하지 않다는 게 문제다.
이들을 방해하는 캐럴은 불만투성이에 알코올 중독자다. 세상 누구도 믿지 않고 코웃음을 치며, 밤마다 보드카 병을 쥐고 소파에 잠드는 그녀야말로 빌런에 가까울 지 모른다. 비호감 자체인 그녀 때문에 이탈하는 시청자도 일부 있는 것 같지만, 캐럴의 못 말리는 똥고집은 드라마를 어떻게든 앞으로 한발 한발 진전시킨다.
<플루리부스>의 행복엔 어떤 조건이 있다. 하지만 캐럴은 자신의 자의식을 절대로 버리지 못하는 인간이다. 그 자의식 때문에 하루하루 고통스러울지라도. 손쉬운 행복이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는데, 왜 어떤 사람들은 이를 거부하는 걸까. 우리 모두의 완전함과 오히려 맞서 싸우는 캐럴의 모습은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서도 드라마는 유머를 잃지 않는다. 절묘한 호흡 속에서 던져지는 블랙 코미디의 순간들이 있다. 예컨대 사람들에게 무심코 던지는 폭언은 때때로 진짜 큰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다. 전화의 자동응답 메시지가 인간의 감정을 다양하게 건드릴 수 있다는 사실도 새삼 곱씹게 된다.
캐럴의 의지를 꺾는 복병은 매력적인 이웃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녀와 함께 세상을 구할 사람은 정말 아무도 없는 걸까 싶은 순간,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누군가가 여정을 시작한다. 집요하고 외로운 인물들이 모노드라마에서처럼 홀로 무언가와 싸우는 모습은 때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후반의 전개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초반에 비해 지루하고 느슨한 면이 분명 있다. 지나치게 모호하다는 점도 시청자들의 불만을 낳는다. 빈스 길리건은 설명 따위 없어도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믿고 따라올 것이라며 언제나 자신만만한 것 같다. 범죄나 누아르는 빌런들의 촘촘한 수 싸움만으로도 시청자를 묶어둘 수 있지만, SF는 다른 얘기다.
시청자들은 거대한 계획의 정체에 대해 아주 찔끔 알아낸 게 전부다. 문제는 앞으로 어떤 위기가 어떤 식으로 닥쳐올지, 그 예측마저 어렵다는 점이다. 애플티비의 또 다른 문제작이었던 <세브란스>의 ‘호기심 자아내기’ 전략이 <플루리부스>에서도 계속 통할까. 제작이 확정된 시즌2의 전개 방향은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
김유미 아르떼 객원기자
[드라마 <플루리부스: 행복의 시대> 공식 예고편 | Apple 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