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의 원조…가장 미국적인 고전

입력 2026-01-18 09:57
수정 2026-01-18 09:59


"가족의 개념을 재정의한다."

뉴욕 타임스는 2024년 김하나·황선우 작가의 에세이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어요. 이 책은 결혼이나 혈연, 연인 사이로 묶이지 않은 두 여성의 동거와 우정을 유쾌하게 담아냈어요. 새로운 가족의 미래를 제시해 국내외에서 주목받았죠. 억대 선인세를 받고 미국과 영국 대형출판그룹에 판권이 수출됐고, 영미권에 오는 20일께 출간됩니다.



가족의 형태는 계속해서 발명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해 자녀를 낳는다.' 이런 가족의 공식은 점차 희미해져가요. 그 변모의 역사는 책으로 기록돼왔습니다. 헨리 제임스가 1886년 출간한 장편소설 <보스턴 사람들>은 여성 참정권 운동이 한창이던 19세기 보스턴을 배경으로 가정 안팎의 격변하는 풍경을 그렸습니다. 이성 간 결혼을 거부하고 비혼 여성 두 명이 동거하는 것을 뜻하는 '보스턴 결혼(Boston marriage)'라는 말이 이 작품에서 유래했어요.

사랑하려면 결혼하지 않는다

<보스턴 사람들>은 삼각관계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구도가 조금 독특해요. 한 여자를 두고 남자와 여자가 경쟁해요. 부유한 여성 참정권 운동가 올리브 챈슬러, 그리고 그의 먼 친척으로 남부 출신 보수주의자인 변호사 바질 랜섬이 아름다운 연설가 버리나 태런트에게 각각 한눈에 반했거든요.

올리브는 버리나야말로 자신이 꿈꿔온 "서로의 영혼을 하나로 결합할 수 있는 동성 친구"라 믿습니다. 매력적인 버리나가 나서면 여성 참정권 운동이 대중적 지지를 얻을 거란 계산도 있습니다. 올리브는 버리나가 최면치료사라고는 하지만 실상은 사기꾼에 가까운 부모를 떠나 자신과 유럽을 여행하도록 후원해요. "결혼해달라"고 구애하는 보통의 연인들과 달리 올리브는 버리나에게 외칩니다. "결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줘요!"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의 나날을 보내던 올리브와 버리나의 관계는 뉴욕에서 바질과 재회하며 새로운 국면을 맞습니다. 바질은 "여성들은 공적이고 사회적인 일에 관해서는 완전히 무력하고 무능한 이류"라고 주장하는 한심한 남자예요. 여성 참정권 운동 최전선에 있는 버리나에게 구애하면서도 그녀의 신념은 무시하고 조롱해요. 동시에 유명인사가 돼버린 버리나에 대한 열등감도 품고 있습니다. 바질은 자신의 주장을 출간해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싶어 하지만, 글만 쓰면 편집자로부터 "300년 정도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며 번번이 퇴짜를 맞지요.

그러니까 버리나가 바질과 사랑의 도피를 떠나는 결말은 독자를 실망시킬 수밖에요. '내가 이 꼴을 보려고 700쪽 넘는 소설을 읽었나….' 소설이 성차별주의자 바질에게 동조하고 힘을 실어주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고요.

다만 올리브의 변화를 중심으로 소설을 읽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갑작스럽게 떠나버린 버리나의 무대를 채우느라 올리브는 연설가로 데뷔합니다. 그녀는 여성 참정권 운동을 오래도록 지원해놓고도 연설 기회를 번번이 거절해왔죠. 올리브는 버리나 대신 "보스턴 전체가 지붕 아래 모인 것" 같은 대형 무대에 오르며 공개적으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논쟁적 주제뿐 아니라 세련된 문체가 소설의 수명을 연장시켰어요. "어떤 장소를 밤에 처음 보는 것은 마치 외국어 작가의 작품을 번역으로 읽는 것과 같다"는 표현 같은 건 오늘날 쓰인 소설이라 봐도 손색이 없지요.

미국에서 가장 미국적인 도시, 보스턴

소설의 배경이 된 미국 매사추세츠주(州) 보스턴은 '미국에서 가장 미국적인 도시'입니다. 도시 곳곳이 미국 건국의 역사를 훈장처럼 지니고 있어요. 미국 독립의 불씨가 된 '보스턴 차 사건'이 보스턴 항에서 발생했고,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이곳 출신이죠.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중 보스턴 레드삭스의 연고지입니다.



보스턴은 미국 '지성의 수도'이기도 합니다. 보스턴대, 노스이스턴대 등이 이곳에 모여 있습니다. 찰스강 하나만 건너면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하버드대, 기술 분야를 선도하는 메사추세츠공과대(MIT)가 나와요.

하지만 당대 대학은 모두에게 열려 있지 않았죠. 소설 속에서 버리나는 바질과 함께 하버드대를 산책하던 중에 말합니다. "여성에게는 문을 닫은 학교에 대해 제가 찬사를 표할 거라고 기대하시지는 않으시겠죠." 하버드대에서 여성 입학을 허용한 건 1977년의 일입니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작품에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대략 남북전쟁(1861~1865)이 끝난 1870년대 중반으로 보입니다. 버리나 같은 여성이 하버드대 문턱을 넘기까지 100년이 걸린 거죠.

소설에는 파커스 호텔(현 옴니 파커 하우스), 애서니엄 도서관을 비롯해 보스턴과 뉴욕의 명소들이 등장합니다. 실제 장소를 배경으로 '가부장제 아래 여성과 자본주의 사회 속 빈자 중 누가 더 약자인가' 하는 문제, 여성 인권 운동이 흑인 등 다른 소수자 운동과 연대하거나 경합하는 움직임 등을 담아냅니다. 가령 가난한 변호사 바질은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은 올리브가 여성이지만 특권을 누리고 있으며 도리어 자신이 경제적 약자이니 "당신과 지위를 기꺼이 바꾸고 싶다"고 말하죠. 이처럼 소설은 여러 사상과 계층이 경합하던 당대 미국 사회를 보여주는 하나의 공론장입니다.

여러 목표와 주장이 끓어오르는 역동적 시대가 또 다른 주인공입니다. 소설 속 올리브의 말은 당시 사회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줘요. "당신은 더 나은 시대가 올 것을 믿지 않나요? 그 시대가 인류를 위해 뭔가를 할 가능성을 믿지 않는 건가요?"

'의식의 흐름' 주창한 형제

저자 헨리 제임스는 19세기 사실주의 문학을 이끈 소설가입니다.



1843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제임스는 저명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아버지의 신념에 따라 유럽 곳곳을 경험하며 10대를 보냈어요. 하버드대 법학과를 다니다 소설 습작을 시작했고, 20대에 소설가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영화로도 각색됐던 <여인의 초상>을 비롯해 여러 작품을 남겼습니다. 20세기 영국의 평론가 F. R. 리비스는 <보스턴 사람들>을 두고 "영어로 쓰인 가장 뛰어난 두 소설 중 하나"라고 했는데, 나머지 하나로는 <여인의 초상>을 꼽았어요. 제임스가 최고란 거죠. 제임스는 대서양 양안을 오가며 활약하다 영국인으로 귀화한 이듬해인 1916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등장인물의 무질서한 의식세계를 가감없이 그리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보여준 대표적 작가입니다. 이 개념 자체가 제임스의 형이 제시한 거예요. 1살 위 친형은 저명한 철학자이자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로, 하버드대에서 미국 최초로 심리학 과목을 가르쳐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로 불리죠. 윌리엄은 '의식의 흐름'이라는 개념을 주창하면서 사람의 의식이란 여러 생각이 사진처럼 정지된 채 모여 있는 게 아니라 동영상처럼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흐름이라고 봤습니다. 인간 심리에 대한 이런 관점 전환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등 여러 문학 작품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