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빅7’ 게임사들의 시가총액 합계가 올해 들어 30조원 아래로 추락했다. 불과 1년 전 31조원을 웃돌던 몸집이 급격히 쪼그라들며, K-게임 산업을 떠받쳐온 성장 공식에 명확한 균열 신호가 켜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중접속역할게임(MMORPG)과 확률형 아이템에 의존해온 기존 수익 모델이 더 이상 시장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사이 게임 이용자 감소와 장시간 몰입 문화의 붕괴가 동시에 진행되며 위기감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빅7’ 게임사 시총 1년새 4조원 증발
8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2일 기준 국내 주요 게임사 일곱 곳(크래프톤·엔씨소프트·넷마블·시프트업·펄어비스·카카오게임즈·위메이드)의 시가총액의 합은 27조6356억 원으로 전년 동기(31조4190억원) 대비 12.0% 감소했다. 불과 1년 만에 약 4조원에 가까운 기업 가치가 증발한 셈이다. 이는 일본 유가증권 시장에 상장한 넥슨과 시가총액 기준으로 3~4조원 안팎의 평가를 받지만 비상장 상태인 스마일게이트를 제외한 수치다.
국내 게임사들의 기업 가치 하락은 단기 실적 부진보다 중장기 성장성에 대한 시장의 재평가가 본격화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증권가에서는 최근 주요 게임사들의 목표주가를 잇달아 하향 조정하며 “신작 성과의 불확실성이 커진 데다 기존 주력 IP의 매출 둔화가 구조화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하반기 이후 대형 게임사 상당수가 실적 가이던스를 보수적으로 제시하거나 신작 출시 일정을 연기하면서, 투자자들의 기대치도 빠르게 낮아졌다.
‘히트작 하나로 반등할 수 있다’는 과거의 기대 공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으면서, 게임 업종 전반에 대해 할인율이 높아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용자 줄고, ‘저몰입’ 봉착한 K-게임
게임을 떠받칠 이용자 기반도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2025 게임이용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게임 이용률은 50.2%로 전년(59.9%) 대비 9.7%포인트 감소했다. 2015년 첫 조사 이후 역대 최저 수준이다. 이탈한 이용자들은 대체 활동으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TV·영화·애니메이션 등 영상 시청(86.3%)’을 선택했다.
이용자의 몰입도마저 낮아지며 ‘저몰입’ 현상이 산업 전반을 관통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헤비 유저들조차 장시간 플레이를 요구하지 않는 콘텐츠를 선호하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오래 할수록 강해진다’는 전제를 깔고 성장해온 MMORPG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변화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장시간 플레이가 미덕이었지만, 지금은 오래 붙잡는 게임이 피로하다는 반응부터 나오고 있다”며 “몰입을 전제로 설계된 게임이 오히려 진입 장벽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주요 게임사들은 최근 모바일·MMORPG 중심의 기존 산업 구조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다. 김택진·박병무 엔씨소프트 공동대표는 전날 공개한 신년사에서 “2026년은 모든 것을 제로 베이스에서 재설계하는 해가 될 것”이라며 성장과 혁신을 동시에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방준혁 넷마블 의장도 이달 초 신년사를 통해 “기존 성공 공식을 반복하는 방식으로는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만들기 어렵다”며 근본적인 체질 전환을 주문했다.
주요 게임사가 잇따라 전략 수정에 나선 것은 30년간 이어진 성장 공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장시간 접속과 반복 과금을 전제로 한 MMORPG 모델은 이용자 수 확대와 몰입도 유지가 전제돼야 성립한다. 하지만 이용 환경과 여가 소비 구조가 빠르게 바뀌면서 이 전제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판단이다. 주요 게임사 주가 ‘뚝’…업계에선 “해법 찾아야”이 같은 구조적 변화는 게임사들의 주가에도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과거처럼 ‘대작 하나로 수년간 성장을 담보하던’ 밸류에이션 공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판단이 투자자들 사이에서 확산하면서다. 지난해 크래프톤, 카카오게임즈, 위메이드 등 주요 게임사 주가는 전반적으로 부진한 흐름을 이어갔다. 신작 성과가 단기 반등을 이끈 경우도 있었지만, 이용자 기반 축소와 장르 구조 변화에 대한 우려가 상단을 눌렀다.
대형 게임사들은 저몰입 콘텐츠 확산과 장르 다변화 방식으로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대표적 해법이 플레이어의 직접적인 조작 없이도 캐릭터나 시스템이 자동으로 성장하고 재화를 획득하는 방치형 장르의 확대다. 넥슨은 지난해 11월 출시한 ‘메이플 키우기’ 흥행 이후 ‘바람의나라’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한 방치형 RPG 상표권을 잇달아 출원했다. 넷마블은 ‘킹 오브 파이터즈 AFK’를, 그라비티는 ‘라그나로크 아이들 어드벤처 플러스’를 선보였다.
시장조사업체 센서타워에 따르면 방치형 게임의 국내 모바일 시장 비중은 2020년 1.7%에서 지난해 16%로 급증했다. MMORPG 비중은 같은 기간 78.8%에서 56.2%로 크게 줄었다.
방치형 장르 외에도 슈팅, 서브컬처, 캐주얼 등 비교적 진입 장벽이 낮은 장르로 포트폴리오를 넓히거나, 플랫폼·구독형 모델과 결합하는 등 다른 활로를 모색하는 움직임도 확산하고 있다.
다만 업계에선 이를 장기 성장 전략으로 보기는 어렵고, 축소되는 이용자 환경에서 손익 구조를 방어하기 위한 대응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온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지금의 변화는 시장을 키우기 위한 공세라기보다 줄어드는 이용자 속에서 손실을 최소화하려는 방어적 선택에 가깝다”며 “근본적인 해법은 새로운 이용자층을 끌어들일 수 있는 구조 자체를 다시 설계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안정훈 기자 ajh632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