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컬렉션' 막전막후…JFK공항 큐레이터의 밤샘 작전

입력 2026-01-08 15:10
수정 2026-01-08 17:25
18세기 조선의 이름 없는 도공이 빚은 ‘백자 달항아리’, 그리고 20세기 거장 김환기의 ‘푸른 점화’. 두 작품 사이엔 200년이라는 시간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뿌리는 하나다. “나의 예술은 모두 우리 도자기에서 나왔다”고 말했던 김환기 선생은 평생에 걸쳐 달항아리의 둥근 곡선을 점과 선으로 승화했다. 지금 그 두 점은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 그것도 미국 땅에서.

미국 워싱턴 D.C.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NMAA)에서 오는 2월 1일까지 열리는 ‘한국의 보물: 모으고, 아끼고, 나누다’ 전시는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기증품으로 구성된 국외순회전의 첫 번째 전시다. 3월엔 시카고미술관으로, 9월엔 런던 대영박물관으로 여행을 떠난다. 400여 점의 국보급 작품으로 이뤄진 이번 단순한 전시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삼국시대 금동불상부터 조선의 인왕제색도, 현대의 김환기·박수근에 이르기까지 1500년 한국 미술사를 관통하는 걸작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어서다.

K컬처가 전 세계에 확산한 지 수년 째이지만, ‘한국 문화의 원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그 동안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K팝 가수들의 화려한 에너지, 영화와 드라마의 세련된 연출력이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지 못했다. 수천 년간 응축된 ‘한국의 미학적 정수’가 수 세기에 걸쳐 도예로, 회화로, 조각으로 진화해 왔다는 사실을 이번 전시는 대서사로 풀어낸다. “아이돌 그룹의 군무가 K컬처의 꽃이라면, 곡선의 미학과 미니멀리즘이 살아있는 한국의 예술 작품들은 그 뿌리에 가깝다”는 현지의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문화예술이 곧 국격”이라 믿은 한 수집가의 뜨거운 열망과 철학, 이 보물과 같은 기증품들을 어루만져 머나먼 땅에 무사히 내보낸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의 학예 연구사들, 그리고 인류 보편의 미적 가치를 탐구하는 해외 미술관들의 호기심이 한 데 모인 결과는 찬란하다. 첫 전시에 한달 여만에 4만 명의 관람객이 모였고, 기념품은 대기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야 겨우 구할 수 있는 풍경이 연일 펼쳐진다.


어쩌면 우리조차 몰랐던 한국 문화의 DNA에 세계가 열광하는 지금. ‘과거의 예술’이 긴 세월을 관통하며 ‘살아 숨쉬는 대화’로 이어지는 장면 속으로 안내한다. 김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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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국립중앙박물관 류승진 신소연 큐레이터
“4년 준비한 전시…미국 셧다운에 ‘이것’까지 했어요”

지난해 10월, 류승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미국 뉴욕 JFK공항에서 유물 상자를 지키며 초조해했다. ‘이건희 컬렉션’ 전시품의 통관 절차가 지연되면서 꼬박 하루를 공항에 잡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 정부의 연방정부 셧다운(일시적 업무 정지) 소식으로 지난 4년간 준비해 온 전시가 예정대로 열릴 수 있을지 걱정되던 참이었다. 류 학예사는 “‘호사다마’라는 말을 실감했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지금 워싱턴이 열광하는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의 이건희 컬렉션 해외 첫 전시 ‘한국의 보물: 모으고, 아끼고, 나누다’ 뒤에는 수많은 고비가 있었다. 이번 전시는 한국의 국가적 보물들이 미국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시카고박물관·영국 영국박물관 등 최고의 박물관들을 순회하는 ‘역대급 전시’. 그만큼 업무도, 돌발 상황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박물관이 최고 인기 전시실인 ‘사유의 방’ 개관을 담당한 신소연 학예연구관, 아시아 유물 및 해외 전시 전문가인 류 연구사 등 ‘에이스’들을 투입했던 이유다. 두 사람을 만나 전시의 막전 막후를 들었다.




팝스타 공연 유치하듯...박물관들 '자존심 싸움'

시작은 이건희 삼성 선대 회장이 국가에 유물들을 기증한 직후인 20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의 보물을 외국에서도 보여주고 싶다”는 이야기가 정부 안팎에서 나오자, 7월 미국 시카고박물관이 가장 먼저 손을 내밀었다. 1년 뒤인 2022년 11월 워싱턴 D.C. 스미소니언 재단 산하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이 참여 의사를 밝히며 판이 커졌다.

그런데 상황이 복잡해졌다. 일반적인 관례에 비춰 보면 미국 순회전 기획을 주도한 시카고박물관이 첫 개최지가 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은 “우리는 미국 내 아시아미술 전시를 이끌어온 기관이니 반드시 먼저 전시를 열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미국 3대 미술관’으로 꼽히는 시카고박물관도 전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결국 두 박물관은 전시 주도권을 놓고 팽팽한 기싸움을 벌이게 됐다.

결국 국립중앙박물관의 중재로 상황이 정리됐다. 시카고박물관은 미국 내 전시 기획을 주도하고 도록을 발간하되 첫 전시는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이 열기로 했다. 여기에 더해 뒤늦게 합류를 결정한 영국박물관까지, 세 기관이 각기 다른 색깔로 전시를 꾸미기로 했다.

지금 열리고 있는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 전시는 조선시대의 사회상과 유교 문화를 중점적으로 조명한다. 시카고는 회화를 중심으로 이건희 컬렉션에 대한 심도 깊은 미술사적 접근에, 영국박물관은 청동기 시대 유물인 청동방울 등을 통해 고고학적 해석에 무게를 둘 예정이다.



다사다난했던 ‘국보 운송 특별 작전’

국보와 보물을 대거 국외로 내보내려면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2023년부터 2024년 상반기까지 미국 박물관 관계자들과 전시 예정품 실사를 하고, 춘천과 제주 등 국내 순회전이 진행 중이던 곳에 직접 내려가 상태를 점검한 건 기본. 1년에 걸쳐 세심한 세척, CT 촬영 등 첨단 기술을 동원한 대대적인 보존 처리가 이뤄졌다. 신 연구관은 “전시품들의 상태에는 손색이 없었지만 해외 전시임을 고려해 더욱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다”며 “보존과학팀에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전했다.



운송 작업도 쉽지 않았다. 400점 넘는 유물들이 워싱턴, 시카고, 영국 런던 등 각기 다른 경로로 움직여야 했다. 류 연구사는 “초고난도 퍼즐을 맞추는 느낌이었다”며 웃었다. 여기에 유물 보존을 위한 전시 기간까지 계산에 넣어야 했다.

예컨대 인왕제색도와 추성부도 등 서화(書?)류 고미술품은 1년 동안 노출될 수 있는 빛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 해외 전시임을 감안하면 국내보다 더욱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야 했다. 이를 위해 전시팀은 각 전시를 전·후반기로 나눠 유물을 교체 전시토록 하고, 전시장 조도(照度)를 섬세하게 조절했다. 준비한 전시는 세 개지만 사실상 작은 전시 수십 개를 준비하는 것과 맞먹는 업무량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작품이 무사히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에 도착했지만, 마지막 위기는 설치 현장에서 터졌다. 미국 연방정부의 셧다운(일시적 업무 정지)으로 인해 박물관 직원 대부분이 출근하지 못한 것. 한창 작업 중이던 필수 인력들조차 시간이 되면 가차 없이 퇴근하는 상황이었고, 전시팀은 매일 현지 직원들의 퇴근 시간에 맞춰 스케줄을 분 단위로 쪼개야 했다. 북 받침대인 ‘법고대’를 설치할 때는 리프트 장비를 운용할 수 있는 직원이 나오지 못해 결국 학예사 등 네 명이 직접 유물 다리를 잡고 들어 올려 설치를 마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문화 영토 넓어지는 계기 됐으면”

이번 전시는 1980년대 열린 ‘한국 미술 5000년 전’ 이후 40여 년 만에 열리는 대규모 국보 순회전이다. 당시 열렸던 전시는 해외 박물관 곳곳에 별도로 독립된 한국 전시실이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이번 전시도 벌써 실질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준비 과정에서 시카고박물관이 통로의 협소한 공간에 있던 한국 소장품 전시 공간을 약 28평 규모의 단독 전시실로 확장 이전한 게 대표적이다.



전시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해외에서 한국 문화의 소비층을 넓히는 것이다. 전통 유물과 현대미술을 함께 보여주면서 한국 미술의 연속성과 정체성을 알리고, 해외 박물관이 한국 현대 작가의 작품을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신 연구관은 “해외 한국관을 꾸준히 지원해 온 노력과 세계 각국 박물관에 포진한 한국실 담당 학예 인력이 맞물려 성과가 나고 있다”며 “이번 전시를 계기로 한국 문화의 영향력이 더욱 강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성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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