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방산·원전 시장 재편…'속도와 신뢰'의 기업이 뜬다 [글로벌 머니 X파일]

입력 2026-01-13 07:00
수정 2026-01-13 07:04
<글로벌 머니 X파일>은 2026년 신년 기획으로 대한민국의 생존 전략을 ‘트러스트 커넥터’로 제시합니다. ‘트러스트 커넥터’는 '가격'이 아닌 '신뢰(Trust)'와 '연결(Connect)'이라는 한국의 글로벌 지정학적 강점을 극대화하는 전략입니다. 한국이 어떻게 신뢰와 연결을 자산으로 바꿔 번영의 길을 찾을 수 있을지 살펴봅니다.

최근 글로벌 안보에서 ‘비용 효율’보다 ‘신뢰와 속도’가 주목받고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2023년 중동 분쟁으로 전 세계에 안보 공급망이 급격히 흔들리면서다. 서방의 방산 강국들이 납기 지연과 비용 초과로 허덕이는 사이 한국은 ‘약속된 날짜에, 약속된 성능을, 약속된 예산으로’ 공급하는 능력을 보여줬다는 평가도 나온다. 수십 년간 북한과의 대치 속에서 유지해 온 전시 양산 체계와 제조 역량이 ‘지정학적 불확실성’이라는 변화에 급격한 관련 수요로 이어졌다. 글로벌 에너지 시장에서도 한국은 비슷한 이유로 주목받고 있다.경쟁력 떨어진 서방 기업13일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 등에 따르면 독일의 '레오파드2' 전차를 신규 주문해 인도받기까지는 3~10년이 걸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서방의 방산 공급망이 병목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는 뜻이다.

에너지 시장도 비슷하다. 탈탄소 기조 속에 원전 투자를 줄였던 유럽 등 서방 국가들은 에너지 안보 위기에 직면하자 다시 원자력을 찾았다. 하지만 프랑스(EDF)와 미국(웨스팅하우스)은 숙련된 인력 부족과 관련 공급망 부실로 공기 지연과 예산 초과를 겪고 있다.

반면 한국 방위산업은 성장했다. 산업통상자원부와 국방부에 따르면 2023년 135억 달러였던 한국 방산 수주액은 2025년 150억 달러로 늘었다.

한국 방산은 육상 전력이 강점이라는 분석이다. 현대로템의 K2 흑표 전차와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K9 자주포가 대표적이다. 2022년 폴란드와 맺은 1차 계약 물량은 계약 체결 불과 3~4개월 만에 초도 물량이 선적됐다. 작년 말까지 1차 계약분 전량이 인도 완료됐다. 독일 전차의 납품 리드타임이 수년인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다.


작년 8월 체결된 폴란드와의 K2 전차 2차 실행 계약은 약 65억 달러 규모였다. K2GF와 폴란드 현지 생산 모델인 K2PL 등을 포함해 수십 대를 추가 도입하는 내용이다. 올해부터 폴란드 현지 공장에 관련 기술을 이전하고 2028년부터는 라이선스 생산도 시작한다. 한국이 무기 판매국을 넘어 유럽의 방산 제조업 파트너로 확장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루마니아 시장에서도 성과가 나왔다. 루마니아 정부는 2024년 7월 약 9억 2000만달러 규모의 K9 자주포 54문 도입 계약했다. 현재 30억 유로 규모의 보병전투장갑차(IFV) 사업에서도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레드백’도 검토 중이다. 독일 라인메탈의 ‘링스’와 치열한 수주전을 벌이고 있다.

변화는 바다에서도 일어났다. 작년 한국 조선업은 미국 해군 시장을 뚫어냈다. 한화오션은 국내 조선소 최초로 미 해군 군수지원함 ‘월리 시라’ 호의 창정비(MRO) 사업을 수주했다. 미 7함대 소속 급유함 ‘유콘’ 호의 정비 사업까지 따냈다.

이는 세계 최강 미 해군이 자국 함정의 정비를 한국 조선소에 맡길 만큼 한국의 기술과 납기 준수 능력을 신뢰한다는 해석이 나온다.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조선업 재건’ 기조와 맞물려 한국 조선소는 미 해군의 유지보수 능력을 떠받치는 필수 파트너가 되었다.

항공 분야에서는 KAI의 FA-50이 ‘가성비’를 넘어 ‘즉시 전력감’으로 주목받고 있다. 폴란드는 미제 F-35 도입 지연에 따른 전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FA-50 48대를 도입했다. 올해부터는 말레이시아 수출 물량 인도도 시작된다.

원전은 ‘에너지 생존권’을 파는 사업이다. 한국 원전 산업은 2009년 UAE 바라카 원전 수주 이후 16년 만인 지난해 유럽 체코에서 다시 한번 성과를 냈다. 한국수력원자력(KHNP) 컨소시엄은 체코 두코바니 신규 원전 2기 건설 사업의 최종 계약을 체결했다. 총사업비는 약 24조원에 달하는 대형 프로젝트다.

프랑스 EDF가 강력한 로비를 펼쳤지만 체코가 한국을 선택한 결정적 이유는 ‘신뢰’였다는 평가다. UAE 바라카 원전 4기를 예산 초과 없이 제때 완공한 한국의 실적은 핀란드 올킬루오토 원전 등에서 10년 이상 공기를 지연시킨 프랑스와 크게 대비됐다.한국 기업의 고민한국 방산과 원전의 성장은 기존 강국의 견제와 내부 리스크를 동반한다. 수십조 원의 무기 거래는 ‘물건만 좋으면 팔리는’ 시장이 아니다. 구매국에 대규모 차관을 제공하거나 지불 보증을 서주는 금융 패키지가 필수다. 폴란드 2차 계약 과정에서 한국수출입은행의 자본금 한도 부족 문제가 불거지며 계약이 지연될 뻔했다.

원전 분야에서는 미국의 견제가 노골적이다. 미국 웨스팅하우스는 한국형 원전이 자사 기술을 기반으로 했다며 지식재산권(IP)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따라 작년 폴란드 퐁트누프 민간 원전 사업에서 한국은 사실상 철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원천 기술의 완전한 자립 없이는 수출 주도권이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체코 사업은 예외로 인정받았지만 향후 사우디나 영국 시장 진출 시 미국의 태클은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


구매국들의 현지 생산 요구가 거세지면서 국내 일자리 유출 감소 우려도 나온다. 폴란드 K2PL 현지 생산, 루마니아 K9 공장 설립 등은 단기적으로는 수주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국내 생산 물량을 해외로 이전시키는 ‘산업 공동화’를 초래할 수 있다. 국내 노동계와 중소 협력 업체들은 “핵심 기술만 퍼주고 껍데기만 남는 장사가 될 수 있다”며 우려를 표하고 있다.

그런데도 방산과 원전의 한국 경제에 대한 긍정적 파급력은 커졌다. 그동안 반도체와 자동차에 편중되었던 수출 포트폴리오가 방산과 원전이라는 고부가가치 수주 산업으로 다변화됐다는 분석이다. 주요 방산 4사의 이달 기준 추정 수주잔고는 약 100조 원에 육박한다.

해당 수주잔고는 향후 4~5년간 기업 공장을 100% 가동할 수 있는 일감이다. 이는 관련 부품 업체, 철강, 정밀기계 산업 전반에 낙수효과를 일으켜 내수 경기 방어에도 기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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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