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머니 X파일>은 2026년 신년 기획으로 대한민국의 생존 전략을 ‘트러스트 커넥터’로 제시합니다. ‘트러스트 커넥터’는 '가격'이 아닌 '신뢰(Trust)'와 '연결(Connect)'이라는 한국의 글로벌 지정학적 강점을 극대화하는 전략입니다. 한국이 어떻게 신뢰와 연결을 자산으로 바꿔 번영의 길을 찾을 수 있을지 살펴봅니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 심화 속에 이른바 '클린 테크'가 주목받고 있다. 반도체 등의 성능과 가격이 여전히 시장에서 중요 변수다, 하지만 이제 “어디서 왔으며, 누구의 손을 거쳤는가”라는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 글로벌 공급망에서 퇴출당하는 경우도 생겼다는 분석이다. 믿을 수 있는 기업 '주목'11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상무부는 2024년 12월에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의 적용 범위를 대폭 확대하며 반도체 공급망에 대한 '현미경 검증'을 의무화했다.
데이비드 리버 엔비디아 수석보안책임자(CSO)는 지난해 8월 자사 블로그를 통해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에는 지금도, 앞으로도 어떤 형태의 킬 스위치나 백도어도 없어야 하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라며 "백도어도, 킬 스위치도, 스파이웨어 같은 것으로 결코 신뢰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 수 없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와 마이크론 등의 전망에 따르면 HBM(고대역폭메모리) 시장 매출은 작년 350억 달러에서 2028년 1000억 달러 규모로 커질 전망이다.
역시 가장 큰 파급 효과는 AI 인프라의 심장인 HBM 시장에서 나타나고 있다. 엔비디아의 AI 가속기 '루빈' 아키텍처가 요구하는 HBM4(6세대)로의 전환이 가속하면서 기술력과 신뢰성을 모두 갖춘 한국 기업의 독주가 이어지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작년 2분기 기준 HBM 시장 점유율 약 62%를 기록하며 압도적 1위를 굳혔다. 2024~2025년 HBM3E 수율 문제 등으로 고전했던 삼성전자는 올해를 반등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삼성의 무기는 설계 제외 전 공정(메모리-파운드리-패키징)을 일괄 처리하는 '턴키' 솔루션이다.
파운드리(위탁생산) 분야에서도 '클린 칩' 규제가 한국 기업이 반사이익을 보고 있다. 미국 상무부의 수출 통제가 강화되면서 중국 파운드리 기업들은 첨단 노드 접근이 원천 봉쇄됐다. 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 정부로부터 '신뢰받는 반도체 기업' 지위를 사실상 인정받았다는 해석이 나온다. 삼성전자의 미국 테일러 공장은 서방 세계의 안보 수요를 맞출 핵심 거점으로 부상했다는 평가다. 확장하는 신뢰 인프라이런 신뢰의 파급력은 하드웨어를 넘어 소프트웨어와 인프라로 확장되고 있다. '데이터 주권이 글로벌 이슈로 떠오르면서, 미·중 어느 쪽에도 데이터 종속을 원치 않는 제3 국가들이 한국을 대안으로 선택하고 있다. 독일은 올해 말까지 5G 코어망에서 중국산 장비를 전면 배제하기로 확정했다.
영국도 2027년까지 화웨이 장비 철거를 진행 중이다. 이 공백을 삼성전자의 vRAN(가상화 무선접속망)과 오픈 랜(Open RAN) 솔루션이 파고들고 있다. 삼성전자는 독일 보다폰과 대규모 오픈 랜 공급 계약을 체결하며 유럽 시장의 주류로 부상했다는 평가다.
글로벌 클라우드 시장의 판도도 바뀌었다. 네이버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디지털 트윈 플랫폼을 구축하는 1단계 사업을 완료했다. 사우디 정부가 미국(프라이버시 우려)과 중국(보안 우려) 대신 기술력과 정치적 중립성을 갖춘 한국을 선택한 결과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글로벌 시장의 '클린 테크' 체제로 전환이 긍정적인 효과만 낳는 건 아니다. 비용 효율성 대신 신뢰를 택한 대가로 글로벌 경제는 막대한 비용을 치르고 있다. 공급망 실사, 추적 시스템 구축, 비효율적인 생산 거점 이동에 따른 비용이 최종 가격에 전가된다.
골드만삭스 리서치는 최첨단 반도체를 대만 대신 미국에서 생산할 경우 건설비가 약 44% 더 높다고 추산했다. JP모간 리서치는 이런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을 '미국 기업과 가계에 대한 세금 인상'이라고 지적했다. 이것이 구조적인 고물가를 유발하는 '지정학적 인플레이션 세금'이 될 수 있다고 경고도 나온다.
미국의 고강도 제재에도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멈추지 않고 있다. 중국은 범용 반도체 시장을 장악하며 저가 공세를 펼치고 있다. 제3국을 경유한 우회 수입과 자체 기술 개발로 생존도 모색 중이다. 중국산 희토류 수출 통제는 한국 등 서방 공급망에 언제든 타격을 줄 수 있는 시한폭탄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세계 파편화로 GDP 손실국제통화기금(IMF)은 미·중 블록화에 따른 '지경학적 파편화'가 장기적으로 세계 GDP를 최대 7%까지 하락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2025년 세계 GDP 기준 약 7조 6000억 달러가 증발하는 것과 맞먹는 규모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사실상 붕괴하고, '트럼프 라운드'로 불리는 양자 간 거래주의가 주목받으면서 글로벌 자본은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 따르면, 2024년 전 세계 외국인직접투자(FDI)가 11% 감소했다. 반면 북미와 아세안 지역으로는 투자 유입은 증가했다. 글로벌 투자 자본은 성장성이 높은 곳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안전하고 투명한 곳으로 흐르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위태롭지만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은 최첨단 제조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미국과 강력한 안보 동맹을 맺고 있다. 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작년 한국 반도체 수출이 1734억 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경신한 것은 이런 지정학적 입지가 경제적 성과로 이어진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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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