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머니 X파일>은 2026년 신년 기획으로 대한민국의 생존 전략을 ‘트러스트 커넥터’로 제시합니다. ‘트러스트 커넥터’는 '가격'이 아닌 '신뢰(Trust)'와 '연결(Connect)'이라는 한국의 글로벌 지정학적 강점을 극대화하는 전략입니다. 한국이 어떻게 신뢰와 연결을 자산으로 바꿔 번영의 길을 찾을 수 있을지 살펴봅니다.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등 중동 산유국이 인공지능(AI)에 대규모 자금을 투자하고 있다. 미·중 기술 패권 전쟁 사이에서 독자적인 '제3의 AI 강국’으로 부상하기 위해서다. 한국은 이런 새로운 '중동 특수'에서 기회를 더 찾아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중동 자본, AI에 '올인'6일 글로벌 투자업계에 따르면 최근 사우디 국부펀드 PIF와 UAE의 국부펀드 무바달라는 전 세계 AI 인프라의 가장 공격적인 구매자 중 하나다. 사우디 PIF는 2025년 한 해 동안 AI 및 디지털 인프라 분야에만 362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UAE의 무바달라는 같은 기간 129억 달러를 투입하며 뒤를 바짝 쫓고 있다.
모하메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는 지난해 방미 행사에서 "사우디는 방대한 컴퓨팅 파워 수요를 가지고 있다"며 "단기적으로 500억 달러를 반도체에 투자하고, 장기적으로 수천억 달러 규모의 기술 협력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석유를 팔아 번 돈으로 '데이터 유전'을 사들이겠다는 뜻이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중동의 AI 굴기가 본격화했고 2030년엔 AI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석유 수입을 넘어설 수도 있다"도 전망했다.
중동의 AI 전략은 '단순 수입'에서 '자체 인프라 구축'으로 진화했다. 그 중심에는 지난해 5월 사우디 PIF가 출범한 AI 국가 기업 '휴메인(Humain)'이 있다. 휴메인은 국가 단위의 컴퓨팅 파워를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거대 유틸리티 기업이다.
작년 말 휴메인은 미국 엔비디아와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사우디 리야드 인근에 500메가와트(MW) 규모의 AI 팩토리를 건설하고 있다. 500MW는 통상적인 대형 데이터센터 10개 분량의 전력을 소모하는 규모다. 수십만 개의 최신 GPU가 투입된다.
휴메인은 엔비디아로부터 최신 AI 칩인 'GB300(블랙웰 아키텍처 기반)'을 수령한 것으로 알려졌다. 타렉 아민 휴메인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이것은 전 세계 AI 인프라 구축의 속도를 재정의하는 순간"이라며 "우리는 이제 칩을 단순 소비하는 것을 넘어, 최신 기술을 가장 먼저 운용하는 '티어 1' 국가가 됐다"고 강조했다.
주목할 점은 미국의 수출 통제다. 미국 정부는 첨단 AI 반도체의 중국 유입을 극도로 경계해왔다. 하지만 작년 11월 미 상무부는 휴메인과 UAE의 G42에 대해 3만 5000개 이상의 최신 칩 수출을 승인했다. 사우디와 UAE가 '중국의 뒷문이 되지 않겠다'는 안보적 보장을 제공하고, 데이터센터 운영의 투명성을 약속한 대가로 얻어냈다는 평가다.
사우디의 국영 에너지 기업 아람코의 디지털 자회사인 '아람코 디지털'은 미국의 AI 칩 스타트업 그록과 손잡고 추론 시장도 공략하고 있다. 휴메인이 거대언어모델(LLM)을 학습시키는 데 집중한다면, 아람코 디지털은 산업 현장에서 AI를 실시간으로 구동하는 '추론'을 맡는 이원화 전략이다. 중동이 AI 가치 사슬의 전 과정을 장악하겠다는 뜻이다."공장을 짓지 않으면 시장도 없다"사우디의 변신은 디지털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2024년 2월 출범한 PIF 산하의 '알랏'은 2030년까지 1000억 달러를 투자해 사우디를 첨단 제조 허브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삼았다. 알랏의 전략은 '사우디에서 물건을 팔고 싶으면, 사우디에서 만들어라(Made in Saudi).'다. 사우디가 풍부한 자본과 저렴한 청정에너지를 제공하는 대신, 글로벌 기업에 첨단 공장을 현지에 지으라고 요구하는 '강제적 현지화' 전략이다.
중국의 PC 제조사 레노버(Lenovo)가 대표 사례다. 레노버는 2024~2025년 알랏과 20억 달러 규모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고 리야드에 중동·아프리카 지역 본부와 생산 공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레노버 입장에서 사우디는 미국의 관세 장벽을 우회할 수 있는 '중립 지대'이자, 현지 생산 라벨을 달고 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거점이다.
알랏은 소프트뱅크와 손잡고 1억 5000만 달러 규모의 로봇 공장을 짓고 있다. 미국의 캐리어와도 협력해 첨단 공조 시스템 제조 센터를 만들고 있다. 중국 다화 테크놀로지와는 AI 감시 카메라 공장을 설립했다. 사우디가 단순한 소비 시장이 아니라, 기술을 내재화하여 스스로 제품을 생산하는 제조국을 노리고 있다는 뜻이다.
AI와 전기차 시대의 핵심 광물 확보전에서도 중동 자본의 영향이 커지고 있다. PIF와 사우디 국영 광업공사(Ma'aden)의 합작사인 '마나라 미네랄'은 2023년 브라질 발레의 비철금속 사업부 지분 10%를 26억 달러에 인수했다.
마나라는 아프리카 잠비아의 구리 광산, 파키스탄의 레코 디크 구리·금 광산 등에 전방위적으로 투자했다. 반다르 알코라예프 사우디 산업광물자원부 장관은 최근 "사우디 내 미개발 광물 자원의 가치를 기존 1조 3000억 달러에서 2조 5000억 달러로 상향 조정한다"고 발표했다.
사우디는 아람코의 기술력을 활용해 바닷물에서 리튬을 추출하는 기술을 상용화 단계까지 끌어올렸다는 평가다. 2027년부터 상업 생산을 시작할 계획이다. 단순 채굴을 넘어 정제와 가공까지 자국 내에서 해결하겠다는 '다운스트림 의무화' 정책의 일환이다. 글로벌 광물 공급망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대체하려는 서방 세계에 새로운 대안이 됐다.
하지만 투자 성과가 바로 나올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의견도 있다. 전문가들은 중동의 '속도전'이 낳을 수 있는 부작용을 경고한다. 우선 인재의 공백이다. 하드웨어는 돈으로 살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운용할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와 AI 연구자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우디의 KAUST나 UAE의 MBZUAI(모하메드 빈 자이드 AI 대학)가 전액 장학금을 내걸고 전 세계 인재를 끌어모으는 이유다
지정학적 리스크도 여전하다. 사우디와 UAE가 미·중 사이에서 줄타기하고 있다. 하지만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기 어렵다. 미국은 언제든 안보를 이유로 칩 공급을 중단할 수 있다. 중국은 인프라 지원을 철회할 수 있다. UAE는 화웨이 장비 도입 문제로 미국과 F-35 전투기 도입 협상이 결렬되는 진통을 겪기도 했다.'트러스트 커넥터' 한국의 위기이자 기회중동의 공격적인 투자는 글로벌 거시경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FDI(외국인직접투자)의 블랙홀 현상이 대표적이다. 글로벌 자본과 기업들이 보조금과 거대 시장을 쫓아 중동으로 몰리면서다. 다른 신흥국으로 가야 할 자금이 말라가고 있다. 사우디의 '지역본부 유치 프로그램(RHQ)'은 작년 1분기 기준 616개 이상의 글로벌 기업을 리야드로 불러들였다. 이는 다른 아시아 지역의 투자 유치에도 악재로 작용했다.
자원의 무기화와 인플레이션 우려도 있다 사우디와 UAE가 자원을 무기로 기업 유치에 나서면서, 핵심 광물과 에너지 가격의 변동성이 커지고 있다. 사우디가 테슬라 공장 유치를 위해 콩고의 코발트 광산 지분을 지렛대로 활용하려 했다. 이는 자원을 가진 국가가 공급망을 통제하고 가격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다. 원자재 가격 상승을 부추겨 전 세계적인 '지정학적 인플레이션' 압력을 가중한다.
현재 중동은 과거처럼 한국 건설사에 단순 도급을 주는 '물주'가 아니다. 그들은 기술을 공유하고, 공장을 지어 일자리를 만들고, 리스크를 함께 짊어질 '파트너'를 원한다. 여기서 한국 기업이 파고들어야 할 전략적 틈새는 명확하다는 분석이다. '신뢰(Trust)'와 '연결(Connect)'이다.
네옴시티의 하드웨어(터널, 철도 등)는 중국건축(CSCEC) 등 중국 기업이 저가 공세로 장악했다. 그러나 네옴시티 하드웨어의 '두뇌'는 다르다. 네이버는 작년 6월 사우디 주요 도시를 대상으로 한 디지털 트윈 플랫폼 구축 1단계 사업을 완료했다.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의 3D(입체 영상) 지도를 구축한 것은 사우디 정부의 신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는 평가다.
안보도 중동의 생존 문제다. LIG넥스원은 2024년 체결한 32억 달러 규모의 '천궁-II' 수출 계약을 바탕으로 올해 현재 본격적인 납품과 현지 생산 준비를 진행 중이다. 한국전력 역시 UAE 바라카 원전의 성공을 무기로 사우디 첫 상용 원전 수주전에서 중국, 프랑스와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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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