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의 정치 풍토 속에서는 자신이 속한 정치적 기반에서 배신자처럼 평가받게 되는 일을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20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남긴 이 고백은 한국 정치에 뿌리 깊게 내린 양극화를 상징하는 말로 읽혔다. '탕평'(蕩平)을 이루고자 야당 인사들에 접촉했지만, 돌아온 것은 거절뿐이었다는 대통령의 탄식이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지금, 이재명 대통령이 그 진영의 장벽을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가장 공격적으로 허물고 있다.◇ DJ부터 尹까지…'탕평 인사' 데자뷔
상대 진영의 인사를 전격적으로 발탁해 국정 동력을 끌어올리려는 시도는 우리 정치사에서 매번 있어왔다. 먼저 1998년 DJP 연대로 출범한 김대중(DJ) 정부에서는 보수 진영 인사인 김종필·박태준·이한동·김석수가 총리를 지냈는데, 김석수 총리를 제외한 모든 총리가 모두 자민련 총재였다. DJ가 '정통 보수' 김중권 전 의원을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임명한 것은 특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보수 성향인 김영삼 정부의 마지막 총리였던 고건 전 총리를 첫 총리 후보로 지명했고, 노무현 정부에서 마지막 총리를 지낸 한덕수 전 총리도 보수 정권 내내 출세 가도를 달렸다는 점에서 탕평 인사로 거론됐다. 노 전 대통령은 2005년 선거제 개혁을 통한 각 정당의 연합정치 '대연정'을 제안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명박(MB) 대통령은 취임 2년 차인 2009년 야권의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던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총리로 앉히는 파격 카드를 던졌다. 정 전 총리는 충청 출신의 진보·개혁 성향의 인물로, 평소 MB 정부 정책에 비판적이던 인사를 지명한 것이었다. 당시 청와대는 "포용과 화합의 통합적 리더십"이라는 의미를 설명했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6년 말, DJ 비서실장을 지낸 한광옥 전 의원을 비서실장으로 임명했다. 또 같은 시기 노무현 정부 청와대 정책실장 등을 맡아 '노무현의 남자' 등으로 불린 김병준 국민대 교수를 총리 후보로 지명했다. 다만 이런 탕평 인사가 국정농단 사태로 인한 탄핵소추안 표결을 앞두고 이뤄졌다는 점에서 진정성이 옅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탕평 인사를 시도했으나 '진영의 벽'에 부딪혀 좌절됐다고 공개적으로 토로한 바 있다. 청와대는 당시 주중국대사와 환경부 장관 자리를 야당 인사에게 제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2020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모두가 협치나 통합의 정치라는 취지에 대해 공감했지만, 아무도 수락하지 않았다"며 "지금 우리의 정치 풍토 속에서는 자신이 속한 정치적 기반에서는 배신자처럼 평가받게 되는 일을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22년 민주당 당 대표까지 지낸 김한길 전 대표를 초대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노무현 정부 총리를 지낸 한덕수 전 총리를 재기용한 점도 눈길을 끌었다. 집권 3년 차인 2024년에는 총선 참패 후 문재인 정부의 상징적 인물인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총리 후보자로,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에게 비서실장을 맡기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소식이 알려졌다가 여론의 거센 반발을 사기도 했다.◇ "보수 빨아들이는 '블랙홀'"…파격의 李
이재명 대통령은 소개한 과거 대통령들보다 더욱더 공격적으로 상대 진영 인사를 끌어안는 분위기다. 단순한 상징성이 있는 한두 명을 '얼굴마담' 격으로 배치하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는 평가가 잇따르고 있다. 한 국민의힘 관계자는 "보수를 빨아들이려는 꼭 거대한 블랙홀 같다"고 평가했다.
이 대통령은 취임 후 내각을 꾸리는 과정에서 한나라당 소속이었던 권오을 전 의원을 국가보훈부 장관으로 기용했고, 윤석열 정부에서 임명한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을 유임시켰다. 또 이명박 정부 법제처장이었던 이석연 국민통합위원장 인사도 단행했다. 대선 때는 김상욱 국민의힘(현 더불어민주당) 의원, 허은아 개혁신당 전 대표(현 대통령실 국민통합비서관)를 끌어안기도 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최근에는 신설 기획예산처 초대 장관으로 '보수 3선'인 이혜훈 전 의원을 전격 발탁해 정치권이 요동치고 있다. 장관급인 국민경제자문위 부의장에도 범보수 인사인 김성식 전 의원을 내정했다. 청와대는 "대통령 국정 인사 철학이 기본적으로 통합, 실용 인사 두 축이 있다"는 입장이다◇ 이한동도 제명하더니 이혜훈도…與 내부 반발까지
국민의힘은 이재명 정부행(行)을 택하는 인사들을 향해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퍼붓고 있다. 특히 이혜훈 전 의원은 '배신자'로 규정하며 제명 조치에 나서기도 했다. "변절자", "얼굴마담", "총알받이" 등 격앙된 반응까지 더러 포착된다. 이 역시 역대 대통령의 탕평 인사 대상이 된 이들에게 쏟아졌던 지탄과 다르지 않고, 2001년 자민련이 당 총재인 이한동 총리를 만장일치로 제명한 장면과도 닮아있다.
다만 이 대통령의 탕평책이 레임덕(임기 말 권력 누수) 시기 나온 게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며 보수 진영이 이 대통령의 공격적인 외연 확장에 잘 대응해야 한다는 범보수 내부의 자성론도 있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거국 내각은 정권 말기 레임덕 국면에서 등장하는 유화책인데, 이 대통령이 정권 초기부터 파격적인 확장 전략을 펼치고 있다. 이는 자신감의 발로"라며 "배신자로 몰아세울 때가 아니라 보수 진영이 비전과 담론을 제시하며 국민께 희망을 드려야 할 때"라고 경고했다.
민주당은 대통령의 실용주의와 탕평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며 대부분 치켜세우면서도 무조건적인 응원만 나오진 않는 모양새다. 곽상언 민주당 의원은 "'내란 동조 세력이라도 포용해야 한다'는 의미인지 알 수 없다"며 "국민이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이언주 민주당 의원은 "계엄을 옹호하고 국헌 문란에 찬동한 이들까지 통합의 대상이냐"며 "윤석열 정권에 탄생에 크게 기여한 사람도 통합의 대상이어야 하는가는 쉽사리 동의가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 정부와 극명 대비…한두 번 그치지 말고 지속돼야"
이 대통령의 일련의 탕평 인사가 진정한 협치 시도로 인정받기 위해선 단발성 이벤트에 그치지 않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준한 인천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 대통령의 탕평 인사를 긍정적으로 본다. 능력 위주로 인재를 고루 써야 한다는 건 인사의 원칙"이라며 "자기가 아는 사람, 소수의 사람을 보은 성격으로 등용하는 게 최악의 인사라는 점에서 이번 인사는 지난 정부와 극명하게 대비된다"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이어 "이 대통령의 탕평 인사에 진정성이 생기려면 한두 번에 그치지 말고 지속돼야 한다. 그래야 차기 정부에도 탕평 인사가 하나의 길로 자리 잡을 수 있다"고 제언했다. 여야가 동시에 반발하는 데 대해서는 "양극화된 정치 상황과 더불어 인재풀이 상당히 협소하다는 데서 비롯된 지적들"이라며 "협소한 인재풀에서 등용하다 보니 논란의 요소들이 끼어드는 것인데, 인재풀을 보다 넓힐 필요도 있다"고 덧붙였다.
홍민성 한경닷컴 기자 m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