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 재정적자에 시달리던 이탈리아가 최근 안정된 재정 흐름을 보이고 있다. 대규모 증세 없이도 복지 등 재정 지출 증가를 선별적으로 억제하며 유럽 내 모범 사례로 떠올랐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탈리아와 독일 간 국채 금리 차도 2009년 이후 최저 수준으로 좁혀졌다. 정부의 건전 재정 노력에 힘입어 시장 신뢰도가 회복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GDP 대비 재정적자 3% 미만
이탈리아 의회는 2026년 예산안을 찬성 216표, 반대 126표로 30일(현지시간) 통과시켰다. 예산안에는 220억유로(약 37조3100억원) 규모의 감세 및 지출 증액 방안이 담겼다.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는 예산안에 대해 “더욱 강하고 경쟁력 있는 이탈리아를 건설하기 위한 단계”라고 설명했다.
눈길을 끄는 건 재정적자 목표다. 이탈리아 정부는 2026년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2.8%로 제시했다. 2025년 목표치인 3%보다 낮은 수준이다. 유럽연합(EU)이 요구하는 재정적자 기준(3% 이하)에 부합한다.
이탈리아의 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은 2019년 1.5%였지만 코로나19 기간을 거치며 급증했다. 2020년 GDP의 9.4%까지 치솟았고 2023년에도 7.2%를 기록했다. 2022년 말 들어 멜로니 정부가 재정 안정을 주요 정책으로 삼은 이유다.
멜로니 정부는 우선 재정 건전성을 갉아먹는 대규모 공제 정책과 지원금을 중단했다. 이른바 ‘슈퍼보너스’ 제도가 대표적이다. 2020년 코로나19 기간 건설 경기 활성화를 위해 도입한 이 제도는 건축 공사 때 건물의 에너지 효율을 개선하는 비용의 최대 110%를 세액공제해주는 게 핵심이다. 하지만 멜로니 정부는 2023년 이 제도를 ‘세금 먹는 하마’로 규정하고 단계적 폐지를 추진했다. 2년간 정책 비용이 1100억유로를 넘어서는 등 재정에 큰 부담을 줬기 때문이다.
2019년 도입한 시민소득제를 폐지하는 등 복지 제도도 손봤다. 기존에는 이탈리아에 10년 이상 거주한 저소득층 누구나 보조금을 신청할 수 있었지만, 지원금 수령자를 근로가능자와 근로불능자로 구분해 지원 수준에 차등을 뒀다. 국민 정서를 고려해 대규모 복지 축소를 단행하기보다 복지 대상을 선별적으로 관리하도록 제도를 개편한 것이다. ◇부채 우려는 여전세수 증가도 재정적자를 축소한 요인으로 꼽힌다. 다만 증세보다는 인플레이션에 따른 명목임금 상승으로 세수가 자연스럽게 늘었다는 분석이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2025년 1~7월 세수입은 160억유로로 전년 동기 대비 5% 증가했다.
고용 증가도 세수 증대에 기여했다. 지난 4년간 일자리 약 200만 개가 창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탈리아는 정치적 안정과 재정적 신뢰성, 산업적 강점이 조화를 이룰 때 어떤 결과가 도출되는지 보여준다”며 “EU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재정이 안정되며 차입 비용은 하락했다. 12월 이탈리아와 독일의 10년 만기 국채 금리 차이는 0.5%포인트 내로 좁혀졌다. 2009년 말 이후 가장 작다. FT는 “코로나19 이전과 비교하면 차입 비용이 여전히 높다”면서도 “(이탈리아가) 더 안전한 투자처로 여겨온 (독일) 국채와 비슷한 금리에서 거래된다는 건 다른 국면에 진입했다는 의미”라고 평가했다.
국제신용평가사는 잇달아 이탈리아의 국가신용등급을 올렸다. 지난 11월 무디스는 이탈리아의 국가신용등급을 Baa3에서 Baa2로 높이고, 등급 전망을 ‘긍정적’에서 ‘안정적’으로 조정했다. 무디스가 이탈리아 신용등급을 상향 조정한 건 23년 만이다. 무디스는 “이탈리아 정부의 국가 회복 계획에 따라 시행된 경제·재정 개혁의 꾸준한 실적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피치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도 신용등급을 상향 조정했다.
다만 이탈리아의 낮은 경제성장률과 큰 부채 규모는 여전히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탈리아의 GDP 대비 부채는 136.8%로 EU 평균이 87.8를 크게 웃돈다. 2025년 경제성장률도 0.5%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한명현 기자 wi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