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배터리 회사의 주가를 끌어올린 수주 계약서들이 연일 사라지고 있다. 최근 열흘 새 13조원이 넘는 계약이 깨진 LG에너지솔루션에 이어 엘앤에프까지 4조원에 육박하는 계약이 백지화됐다. 하반기에만 이렇게 사라진 금액이 18조3044억원에 달한다. 국내 배터리사들은 미래 매출이 사라진다는 점을 우려하면서도 이번 계기를 통해 발주처의 옥석을 가리는 기회로 삼겠다고 밝혔다.
30일 업계에 따르면 엘앤에프는 테슬라와 체결한 하이니켈 양극재 공급 계약 금액이 기존 3조8347억원에서 973만원으로 감액됐다고 전날 공시했다. 2023년 2월 맺은 계약은 테슬라에 지난해 1월부터 올해 12월까지 2년간 사이버트럭에 들어갈 배터리용 양극재를 공급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사이버트럭 판매가 주춤해 발주가 거의 이뤄지지 않아 계약서는 결국 휴지 조각이 됐다.
LG에너지솔루션엔 지난 17일 포드(9조6030억원), 26일 FBPS(3조9217억원)로부터 계약 해지 통보가 날아왔다. 포드가 전기 픽업트럭 생산을 중단하고, 배터리관리시스템(BMS)과 배터리 팩을 제조하는 FEBS의 자회사 FBPS가 전기버스 사업을 철수하기로 한 영향이다. 8월에는 포스코퓨처엠이 맺은 9450억원어치의 에너지저장장치(ESS)용 양극재 공급 계약이 해지됐다.
배터리 회사들은 이번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계약 해지분만큼의 미래 매출이 사라진 데다 10여 년 전 국내 태양광 폴리실리콘산업이 고사한 것과 비슷하게 흘러갈 것이란 우려가 나와서다. 2010년대 초반 국내 태양광 업체는 세계적인 신재생에너지 열풍 속에 수조원대 장기 공급 계약을 잇달아 맺고 대규모 차입을 통해 공장 증설에 나섰다. 하지만 중국의 저가 공세와 글로벌 경기 침체로 폴리실리콘 가격이 폭락하자 해외 고객사들은 위약금을 물거나 파산하는 방식으로 계약을 파기했다.
다만 국내 배터리사들은 공급 계약에 따른 증설이 없어 피해가 크지 않다고 했다. LG에너지솔루션 관계자는 “계약이 해지된 건은 관련 투자가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생산 예정 물량 등이었다”며 “계약 해지에 따른 손실은 제한적”이라고 했다. 국내 배터리 회사들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불확실한 고객사를 정리하고 탄탄한 수요처를 발굴하는 기회로 삼겠다고 밝혔다.
김진원 기자 jin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