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정치·군사 정보를 주로 수집해 오던 북한 간첩이 이제 첨단 산업기술까지 노리는 ‘경제 스파이’로 변신하고 있다. 북한 간첩 활동의 영역이 넓어지고 있지만 지난해 1월 국가정보원으로부터 대공수사권을 넘겨받은 경찰의 관련 수사 역량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태양광 기술 빼돌린 北공작원30일 법조계에 따르면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은 국가보안법 위반(회합, 통신, 편의 제공) 혐의로 지난 2월 기소된 무역업체 대표 A씨에 대한 공판을 진행 중이다. 6월부터 이달 19일까지 총 다섯 차례 공판이 이뤄졌고, 내년 2월 25일에도 6차 공판이 열린다.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무역업체를 운영한 사업가 A씨는 2015~2016년 중국 랴오닝성 단둥에서 북한의 대남 공작 총괄부서인 정찰총국 소속 공작원 B씨를 세 차례 접선하고 이메일로 159차례 교신한 혐의를 받는다.
북한 정찰총국이 A씨를 통해 노린 국내 기술은 태양광이었다. 북한은 천안함 피격 사건 이후 내려진 2010년 5·24 대북제재 조치 이후 심각한 전력난에 시달렸다. 이때부터 북한 정찰총국 공작원들은 해외 원료 수입 없이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신재생에너지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는 게 수사당국의 판단이다. 정찰총국 공작원 B씨가 A씨에게 접근해 ‘태양광 스마트 옵티마이저’ 1550개, ‘독립형 태양광 발전시스템’ 3개 세트를 확보한 배경이다.
태양광 패널이 최대 출력에서 작동하도록 돕는 스마트 옵티마이저와 전력망에 연결되지 않고 자체적으로 전기를 생산·저장해 사용하는 발전 설비인 독립형 태양광 발전시스템은 모두 전력 자립도 제고를 위한 태양광 관련 장치다. 북한이 전력 자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국 기술을 확보하려 한 것으로 수사당국은 보고 있다.
A씨는 B씨가 북한 공작원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위장 업체를 설립해 태양광 관련 물품을 반출한 것으로 조사됐다. A씨는 B씨를 소개해 준 C씨에게서 ‘북한 국비유학생 출신인 B씨가 북한 당국의 지시를 받고 태양광발전 관련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취지의 설명을 들은 것으로 파악됐다.
‘김수키’ ‘라자루스’ 등으로 잘 알려진 북한 해킹 조직도 국내 접점을 확대하고 있다. 스포츠 브랜드 안다르 창업자의 남편 D씨는 2014~2015년 한 온라인 게임의 불법 사설 서버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북한 해커와 접촉해 해킹·디도스 공격을 의뢰한 혐의로 11월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또 국내 도박 사이트 총책 E씨는 2022∼2024년 중국에서 북한 정찰총국 소속 해커 등과 접촉하면서 불법 도박 사이트 16개를 개설해 이를 국내 도박 사이트 운영자들에게 판매한 혐의로 지난달 1심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 “경찰, 국정원서 노하우 받아야”대공수사권을 전담하는 경찰이 갈수록 고도화하는 북한 경제 스파이들에게 속수무책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서범수 국민의힘 의원이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경찰 안보수사국이 국가보안법상 목적수행 혐의로 검거해 검찰에 송치한 인원은 지난해와 올해 1~11월 각각 2명에 불과했다. 국가보안법상 목적수행죄는 북한 등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의 지령을 받아 목적 달성을 위한 행위를 했을 때 적용하는 조항이다. 경찰이 이 혐의로 송치한 인원은 2021년 6명, 2022년 4명이었지만 대공수사권을 가져온 뒤엔 줄어들었다.
해외 첩보 역량이 축적되지 못한 탓에 수사가 갈팡질팡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경찰이 산업기술보호법, 부정경쟁방지법 등 기술유출 관련 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한 사건은 올해 1~6월 총 53건이다. 이 중 해외 기술 유출 사건은 8건으로 전체의 15.1%에 그쳤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경찰이 국정원으로부터 안보 수사 노하우를 제대로 전수받지 못하면서 수사력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며 “더 늦기 전에 경찰·국정원 간 공조를 강화하는 등 제도적 보완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류병화/김유진 기자 hwahw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