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아나 존스 시대는 끝났다"…'문화 탈서구화' 선포한 이집트 대박물관

입력 2025-12-31 09:40
수정 2025-12-31 10:02


“인디아나 존스의 시대는 끝났다.” 최근 수년간 서구 문화예술계의 화두 중 하나를 꼽으라면 과거 제국주의 시절 빼앗은 식민지·약소국 문화유산의 반환이 거론된다. 18~20세기 제국주의와 함께 꽃피웠던 ‘모험가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각지에서 긁어모은 보물로 100년 넘는 문화적 풍요로움을 독식했던 값을 치를 때가 됐다는 것이다. 영국은 이라크에 명목상 ‘빌렸던’ 6000여 점의 문화유산을 반환했고, 밀수·약탈 등 불법으로 취득한 문화유산 반환을 약속한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도 지난달 한국전쟁 이후 반출된 속초 신흥사 ‘시왕도’를 돌려보냈다.

전 세계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환수 전쟁의 가장 치열한 전선은 이집트다. 서구권 박물관들이 “인류의 문화적 자산”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사수하려는 ‘S급 유물’들이 대거 탄생한 곳이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국립박물관인 ‘이집트 대박물관’(Grand Egyptian Museum·GEM) 개관을 계기로 ‘네페르티티 왕비 흉상’, ‘로제타석’ 등의 문화유산을 돌려달라는 이집트의 요구가 거세지면서 미술계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훔쳐 간 이집트 왕비 돌려달라”

최근 이집트 내에선 독일 베를린 신박물관이 소장 중인 네페르티티 흉상을 환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현존하는 이집트 유물 중 가장 가치가 크고 빼어난 아름다움을 지닌 것으로 손꼽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이가 오셨다’는 뜻의 네페르티티는 기원전 14세기 인물로, 이집트 제18왕조의 열 번째 왕이었던 아케나톤의 왕비였다. 황금 마스크를 쓴 파라오로 잘 알려진 투탕카멘의 의붓어머니이기도 하다. 당대의 실권자이자 고대 이집트 최고의 미인으로 추정되는데, 그 이유가 바로 기원전 1345년 제작된 네페르티티 흉상 때문이다.

네페르티티 흉상은 3300년이 지난 지금도 세련된 미감을 자랑한다. 매끈한 목선과 시원시원한 생김새는 고귀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흉상이 제작될 당시 이집트가 엄격하고 이상화된 인체를 표현하던 방식을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부드럽게 그리는 아마르나 미술 양식이 꽃피웠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석회암 위에 칠해진 다채로운 안료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어 이집트 고고학계의 기적으로 불리기도 한다. 베를린 신박물관에서도 관람 중 촬영도 금지될 만큼 특별대우를 받는다.



이 흉상은 1912년 독일 고고학자 루트비히 보르하르트가 발굴하며 독일로 옮겨졌다. 독일에선 반출 과정에 불법은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일각에선 일종의 사기극에 가깝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당시 유물이 발견되면 이집트와 반씩 나눠야 한다는 규정에도 당국을 속였다는 이유에서다. 워싱턴포스트(WP)는 “환수론자들은 보르하르트가 이 유물의 진정한 가치를 숨겼다고 주장한다”고 설명했다. 석회암에 진흙을 발라 가치가 없는 유물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독일로 옮긴 뒤에도 10년간 공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다.

이집트의 문화유산 환수운동은 전방위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네페르티티 흉상뿐 아니라 영국박물관이 소장한 로제타석,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이 소장한 덴데라 천궁도 반환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로제타석은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의 수수께끼를 푼 결정적 열쇠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이 발견했지만 1802년 영국군이 전리품으로 챙기며 영국박물관에 소장됐다. 덴데라 천궁 역시 고대 이집트인이 우주를 바라본 시각을 담은 천문학 기록물로, 1821년 프랑스 고고학자들이 화약을 사용해 천장에서 떼넨 후 프랑스로 옮겨졌다. 약 35만 명이 청원 중인 관련 유물 환수 청원 웹사이트는 “상형문자 해독 열쇠인 로제타석은 이집트의 정체성으로 반드시 반환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집트가 더 안전”…GEM 개관에 명분 역전

이런 환수 요구에 서구권 박물관이 구축한 방어선은 ‘관리 역량’이었다. 약탈에 대한 도덕적 책임은 인정하더라도, 유물의 보존·관리 기술력이 부족하고 관람 접근성도 떨어지는 아프리카로 무턱대고 반환할 경우 훼손이나 분실의 위험이 크다는 논리다. 2002년 영국박물관, 루브르 등 세계 주요 18개 박물관 관장이 낸 성명서인 ‘보편적 박물관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선언’이 대표적이다. 문화유산은 특정 국가의 소유가 아닌 인류 전체의 자산으로, 가장 잘 보존·전시될 수 있는 곳에 머물러야 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실제로 BBC에 따르면 이듬해 영국박물관은 이집트 정부의 로제타석 대여 요청에 대해 런던이 가장 보편적으로 접근 가능하고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는 장소라는 이유로 거부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지난달 이집트 카이로에 이집트 대박물관이 문을 열면서 서구권 박물관의 논리가 흔들리고 있다. 세계 유수의 박물관보다 선진적이고 규모가 큰 박물관이 아프리카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약 20년 간 10억 달러를 들여 완공한 이집트 대박물관은 10만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단일 문명을 다루는 전시 시설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최첨단 보존과학 기술을 갖췄고 투탕카멘 황금 마스크부터 람세스 2세 화강암 석상 등 소장품 면면도 압도적이다. 4500년 전 쿠푸왕의 목선 ‘태양의 배’를 관람객이 보는 앞에서 공개 복원 작업에 나서는 등 이벤트도 화려하다. 이집트 고고학계가 대박물관 개관을 전후해 문화유산 반환 요구를 목소리를 높이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문화유산 환수에 힘이 실리는 또 다른 이유는 서구 박물관의 관리 능력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다는 점이다. 지난 10월 루브르박물관에 도난 사건이 발생한 게 대표적이다. 단 7분 만에 4명의 절도범에게 프랑스 왕실 보석 8점이 털렸는데, 검거하고 보니 영화에 나올 법한 조직범죄가 아닌 좀도둑이었단 사실에 프랑스 문화계가 충격에 빠졌다. 누수로 고서적 400권이 손상되는 사건까지 겹친 루브르는 매년 수용인원 이상의 ‘오버투어리즘’에 시달린다는 지적도 받는다. 이집트 고고학계 권위자로 문화유산 환수운동을 주도하는 자히 하와스 전 유물부 장관은 WP를 통해 “이집트가 유물을 보호할 능력이 없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문화계에 부는 탈식민주의 담론도 문화유산 환수에 힘을 싣고 있다. 올 초 열린 ‘제74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마티 디오프 감독의 ‘다호메이’가 홍상수 감독의 ‘여행자의 필요’를 누르고 최고 영예인 황금곰상을 차지한 게 이런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프랑스가 아프리카 서부 베냉 공화국에 약 130년 전 약탈한 당시 다호메이 왕국의 유물 26점을 돌려주는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로 유물을 박물관에 갇힌 골동품이 아닌 살아있는 영혼으로 형상화해 서구의 소유권 논리를 해체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디오프 감독은 수상 직후 “반환하는 것이 곧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