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츠타야 서점 세 곳을 두 달 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매장 한가운데 전시된 자동차부터 생활용품까지, 서점이라기보다 하나의 ‘경험 공간’에 가까웠다.
“미래의 소비자는 상품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을 원한다. 모든 사람은 디자이너가 돼야 한다”는 창업자의 철학이 체감되는 순간이었다.
자연스레 한국 바이오업계의 현실이 떠올랐다. 그 즈음 아델파이벤처스가 공동 주관한 한미생명과학인협회(KAPAL) 컨퍼런스에서 미국 벤처캐피털(VC)들이 한국 바이오기업에 던진 메시지는 냉정했다.
“플랫폼 잠재력만으로는 투자받기 어렵다. 반박할 수 없는 임상 데이터, 그리고 독립적인 상업화 가능성을 증명하라”는 요구였다.
많은 한국 바이오기업의 비즈니스 모델은 사실상 ‘미완성된 상품(파이프라인)을 파는 사업’에 머무르고 있다. 수조 원대의 라이선스 아웃(기술 수출) 계약이 성사될 때마다 시장은 열광하지만, 이는 결국 빅파마가 환자 삶을 바꾸는 ‘토털 솔루션’의 원재료를 제공하는 데 그친다. 미국 투자자들은 막대한 미래수익을 포기하며, 기술거래 명목으로 섣부르게 현가화하는 바이오업계에 우려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라이선스 협상력에서도 한국이 중국에 밀려 경쟁 우위조차 위협받는 상황이다.
츠타야가 더 이상 ‘책’이 아닌 ‘경험’을 판매하듯, 한국 바이오기업도 단순히 ‘분자(Molecule)’를 파는 것을 넘어 ‘건강한 삶의 지속성’을 스스로 기획해야 한다. 노보노디스크의 위고비 사례는 그 철학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노보노디스크는 비만을 ‘단기 체중 감량을 위한 상태’가 아니라 ‘평생 관리가 필요한 만성 질환’으로 새롭게 규정(질병 정의의 재설계)했다. 주 1회 투여라는 사용자 경험(UX) 설계는 환자의 복약 순응도를 크게 높이며, 앱 생태계를 통한 라이프스타일 관리의 핵심축으로 편입시켰다. 또 대규모 임상으로 체중 감량뿐 아니라 심혈관 질환 위험을 20% 낮춘다는 결과를 확보하며 ‘필수 치료제’로 포지셔닝했다. 보험사와 정부 입장에서는 비만 합병증을 예방해 의료비를 줄일 수 있는 ‘비용 효율적인 솔루션’으로 인식하게 됐고 위고비는 사실상 시장 진입 장벽을 스스로 허문 셈이다.
한국 바이오기업은 이제 약물 후보물질을 파는 ‘상인’의 역할을 넘어야 한다. 위고비 사례처럼 기술·시장·환자의 삶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경쟁사가 쉽게 따라올 수 없는 ‘라이프스타일 디자이너’를 지향해야 한다. 지금 당장 완벽한 디자이너가 될 수 없다면,‘디자이너의 마인드’로 라이선스 및 협력을 진행해야 한다.
라이선스 협상 시, 단순히 계약금이나 마일스톤 금액을 높이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파트너십을 통해 최종 제품의 디지털 관리 플랫폼 참여, 한국 및 아시아 지역의 공동 마케팅·임상 진행 권한 등 ‘라이프스타일 디자인’의 일부 영역을 확보하는 조건을 설계해야 한다. 특히 라이선스의 목표를 자금 확보나 코스닥 조건 달성에만 두지 않고 ‘경험(Experience) 확보’에 두어, 파트너십을 통해 글로벌 규제, 대규모 임상 관리, 상업화 전략 수립 등 미래의 독립적인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핵심 역량을 습득하는 성장 기회로 삼아야 한다. 26년 전 독감 치료제 타미플루의 판권을 로슈에 라이선스했던 길리어드가 오늘날 시가총액 1500억 달러(약 222조원)가 넘는 글로벌 10위권 제약사로 성장한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