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최대 도시 시드니 북서부 벨라비스타의 시니어 레지던스 ‘벨라비스타 헤이븐’. 로비에 들어서면 은은한 커피 향과 함께 카페와 라운지, 공용 정원을 중심으로 펼쳐진 평화로운 일상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입주민 평균 연령은 75세로, 보행 보조기구를 사용하는 이들도 눈에 띄지만 공간은 ‘요양’의 침묵보다는 활기찬 ‘생활’의 소음으로 채워져 있다.
호주 시니어 레지던스는 도심 주택난을 완화할 주거 정책의 핵심 축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고령자가 살던 집을 정리하고 레지던스로 옮겨가면 도심의 대형 주택이 부동산 시장에 풀리기 때문이다.
호주 최대 시니어 레지던스 운영회사 아베오가 보여주는 주거 모델의 핵심은 ‘돌봄’을 주거 공간에서 물리적으로 분리해 서비스 영역으로 상품화한 데 있다. 건물을 지어 분양하고 떠나는 방식이 아니라 장기적인 운영 역량을 통해 자산 가치를 유지하는 구조다. 이는 기업형 임대주택(BTR)산업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입주민은 24시간 응급 대응 시스템을 비롯해 전담 컨시어지를 통한 가사 지원, 식사 배달, 맞춤형 웰니스 프로그램 등 각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춘 통합 관리 서비스를 제공받는다.
시니어 레지던스는 장기 서비스 계약을 기반으로 한 주거 인프라다. 입주자는 기존 주택을 매각하거나 정리한 자금을 바탕으로 입주 시점에 일시금(입주금)을 내고 거주 권리를 확보한다. 거주 기간에는 정기 관리비를 통해 시설 유지와 커뮤니티 운영, 응급 대응 등 기본 서비스를 분담한다. 퇴거 시에는 입주금을 돌려받되 계약 조건에 따라 퇴거비(입주금의 25~35%)가 발생한다.
아베오는 호주 전역에 약 90개 단지, 1만2000실 이상의 시니어 레지던스를 운영하고 있다. 초기 자본 투입이 크고 회수 기간이 긴 산업의 특성을 ‘규모의 경제’로 돌파한 셈이다. 표준화된 운영 시스템을 통해 공사비를 낮추고 관리 효율을 끌어올려 장기 수익성을 확보하고 있다. 토니 랜델로 아베오 대표는 “우리의 역할은 단순히 주거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입주자가 생애 마지막까지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며 품격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생태계를 관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니어 레지던스의 확산은 노인 복지를 넘어 주택 시장의 해법으로도 읽힌다. 시니어 주거가 일정 규모의 인프라로 작동하면서 ‘자산의 순환’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부동산 서비스기업 CBRE에 따르면 호주 75세 이상 고령층의 83%는 주택을 대출 없이 완전히 소유하고 있다. 이들 주택의 평균 가치는 98만호주달러(약 8억7000만원)로 추산된다.
실제로 시니어 레지던스 입주자의 약 70%는 침실 3~4개 규모의 기존 주택을 매각하고 이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입주민이 도심의 대형 단독주택을 정리하고 레지던스로 이동하면 시장에는 가족 단위 실거주자가 들어갈 수 있는 주택 한 채가 공급된다. 고령층의 주거 이동이 신규 택지 개발 없이 도심 주택 재고를 재배분하는 장치로 기능하는 셈이다.
정부도 세제 혜택으로 이를 뒷받침한다. 거주하던 집을 판 자금 중 일부(최대 30만호주달러)를 연금 계좌에 추가 납입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다운사이저(down-sizer) 기여금’ 제도가 대표적이다. 고령층이 집을 줄여 옮겨가더라도 노후 소득 기반이 흔들리지 않도록 설계해 주거 이동의 심리적 장벽을 낮췄다는 평가가 나온다.
호주에서는 75세 이상 인구의 약 13%가 시니어 레지던스에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니얼 개넌 호주부동산협회 사무국장은 “시니어 주거 시장은 주거 선택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시드니=민경진 기자 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