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가 막 태어난 직후 뜨겁고 혼란스러운 공간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물질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은 수십 년간 핵물리학자들이 풀지 못한 난제였다. 한국 연구진이 참여한 국제공동연구를 통해 그동안 이론으로만 설명돼 온 ‘가벼운 원자핵’의 생성 과정이 처음으로 실험에서 확인됐다. 빅뱅 직후 우주 환경을 재현하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거대 실험장비를 통해 중수소 핵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밝혔다.
26일 한국연구재단은 권민정 인하대 교수가 한국팀 대표로 참여한 CERN 국제공동연구팀이 세계 최대 입자가속기인 거대강입자가속기(LHC·사진) 실험을 통해 중수소 생성 메커니즘을 규명했다고 밝혔다. 연구 결과는 세계 3대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됐다.
중수소는 수소보다 약간 무거운 가장 단순한 원자핵이다. 너무 약하게 결합돼 있어 강한 에너지가 작용하면 쉽게 깨질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실제 우주선 충돌이나 입자가속기 실험 등 극한 환경에서 중수소가 꾸준히 생성되는 모습이 관측됐다.
이번 연구는 이 모순에 대한 답을 처음 제시했다. CERN의 가속기에서 양성자끼리 충돌할 때 나오는 데이터를 분석해 중수소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추적했다. 그 결과 중수소는 충돌 순간 즉시 생성되는 게 아니라 충돌 이후 잠시 등장하는 입자들이 붕괴한 뒤 재결합하면서 형성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전체 중수소의 90%가 이런 과정이나 비슷한 과정을 거쳐 생성됐다.
이런 성과가 가능했던 배경에는 CERN의 국제공동연구 체제가 있었다. LHC는 둘레만 27㎞에 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가속기다. 충돌 실험 한 번으로 막대한 양의 데이터가 쏟아진다. 입자물리, 핵물리, 전자공학 등 다양한 전문성이 동시에 필요해 한 나라가 독자적으로 수행하기보다 여러 국가 연구진이 역할을 나눠 참여한다. 대형이온충돌기실험(ALICE)에는 40개국, 170여 개 기관에서 1900명 넘는 연구원이 참여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인하대 연세대 성균관대 등 8개 연구기관이 함께 연구하고 있다.
그동안 중수소 생성 과정은 통계 모델이나 이론적 가설로만 설명돼 왔다. 이번 연구는 직접 실험을 통해 핵 생성 과정을 추적했다는 점에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이영애 기자 0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