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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 중심으로 기업의 수익이 크게 늘었지만 정부 관련 세수는 그만큼 증가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인공지능(AI)이 기업의 생산성 향상에는 큰 도움을 줬지만 나라 살림에는 보탬이 되지 않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른바 'AI의 재정 역설' 현상이 나타나면서다.S&P500 기업의 마진 '13%'27일 글로벌 금융정보업체 팩트셋(FactSet)에 따르면 올 3분기 미국 S&P500 기업들의 혼합 순이익률은 13.1%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 5년 평균인 12.1%를 1%포인트 이상 상회하는 수치다. 팩트셋이 관련 데이터를 집계한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S&P 다우존스 인덱스가 집계한 영업 마진 역시 지난 9월 30일 기준 13.6189로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단순히 매출만 늘어난 것이 아니다. 매출 한 단위당 남기는 이익의 비율이 구조적으로 높아졌다는 뜻이다. 과거에는 기업이 성장하려면 공장을 짓고 사람을 더 뽑아야 했다. 인건비는 기업 성장의 필수 비용이었다. 하지만 AI 확산으로 달라졌다는 분석이다. 골드만삭스와 매켄지 등 투자은행들은 이를 '비직원 레버리지' 효과로 설명한다.
최근 미국 상무부 경제분석국(BEA)이 발표한 지난 3분기 미국 GDP 및 소득 통계에서 이런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3분기 미국 기업 이익(재고 평가 및 자본 소모조정 포함) 증가 폭은 전 분기(68억 달러) 대비 무려 24배 급증한 1661억 달러를 기록했다.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FRED)이 집계한 3분기 미국 법인세 후 이익은 연율 환산 기준 3조 5898억 달러에 달했다. 기업들에는 '황금기'다.
이익은 역대급인데 법인세는 감소보통 기업이 돈을 벌면 세금이 걷히고, 나라 살림이 펴지며, 재정 건전성이 좋아져야 한다. 하지만 법인세는 감소했다. 미 재무부가 공개한 2025 회계연도(2024년 10월~2025년 9월) 결산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연방 정부의 총세입은 약 5조 2346억 달러로 전년 대비 6.4% 증가했다. 하지만 법인세 수입은 4520억 8900만 달러(약 632조 원)에 그쳐 전년 대비 14.7% 감소했다.
전문가들은 'AI 투자를 위한 공제 혜택'과 '회계와 세무의 차이' 등이 요인이라고 분석한다. 올해 시행된 일명'OBBBA(One Big Beautiful Bill Act)'와 기존 세제 감면 조치들은 기업들이 AI 인프라에 투자하도록 강력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다. 핵심은 이른바 '보너스 감가상각(Bonus Depreciation)'의 부활이다.
기업이 수천억 원에 달하는 AI 데이터센터 서버나 엔비디아의 최신 GPU(그래픽처리장치)를 구매할 경우, 과거에는 해당 비용을 5년이나 10년에 걸쳐 나누어 비용 처리(감가상각)해야 했다. 하지만 새로운 세법에서는 구매한 첫해에 투자금 전액을 비용으로 털어낼 수 있다.
해당 기업의 재무제표(장부)상 이익은 막대하게 잡힌다. 하지만 국세청에 신고하는 세무상 소득은 투자 비용만큼 차감한다. '0'에 수렴하거나 오히려 결손이 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소득세 감소 우려정부 입장에서 법인세 감소보다 더 두려운 장기적 위협은 소득세 기반의 붕괴 조짐이다. 미 재무부 자료에 따르면 FY2025 기준 개인소득세 수입은 약 2조 6560억 달러로 전체 세입의 50.7%를 차지한다. 법인세(8.6%)의 약 6배에 달하는 규모다. 나라 살림은 기업이 아니라 월급쟁이들이 떠받치고 있는 구조다.
최근 AI가 이런 월급쟁이들의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것도 가장 숫자가 많은 '화이트칼라'의 일자리가 대상이다. 스탠퍼드 디지털경제랩의 연구에 따르면 ADP 데이터를 활용해 분석한 결과 2023년 이후 AI 도입이 활발한 산업군에서 경력 2년 미만의 엔트리 레벨 고용은 시니어 레벨보다 13% 감소했다.
과거 기업의 인력 구조는 다수의 신입 사원이 하단을 받치고 소수의 관리자가 상단에 위치하는 안정적인 '피라미드형'이었다. 하지만 AI가 코딩 초안 작성, 데이터 정리, 번역, 보고서 요약 등 주니어의 업무를 대체하면서 최근 기업들은 신입을 뽑아 가르치는 비용을 지출하지 않는다.
대신 숙련된 시니어에게 AI 도구를 쥐여주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 결과 조직 구조는 하단이 잘려 나간 '다이아몬드형' 혹은 기둥만 남은 '오벨리스크형'으로 변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AI 기업 앤스로픽의 다리오 아모데이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향후 5년 내 엔트리급 화이트칼라 일자리의 최대 절반이 대체되거나 직무의 성격이 완전히 바뀔 수 있다"며 "우리는 인간이 하던 인지적 노동의 상당 부분을 기계에 아웃소싱하는 시대에 진입했다"고 말했다.
최근 글로벌 IT 기업 IBM은 최근 인사(HR) 부문 인력을 AI로 대체하며 관련 예산을 40% 삭감했다고 밝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인용한 스펜서 스튜어트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마케팅 최고책임자(CMO)의 36%가 향후 12~24개월 내 AI 도입 등을 이유로 인력 감축을 계획하고 있다고 답했다. 매출 200억 달러 이상 대기업으로 한정하면 이 비율은 47%까지 치솟는다.
전문직 시장도 예외는 아니다. 톰슨로이터는 생성형 AI 도입으로 미국 법률 시장에서 변호사 1인당 연간 190시간의 업무 시간이 절감될 것으로 분석했다. 미국 법률 시장 전체로 볼 때 약 200억 달러 규모에 해당한다. 시간당 비용을 청구하던 변호사들의 수익 모델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고소득 전문직이 내던 소득세수의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
영국 예산책임처(OBR)는 이런 변화가 재정에 미칠 치명적 영향을 '유효세율 격차'로 설명한다. OBR의 지난달 경제전망 보고서는 "노동 소득의 유효세율은 약 40%이지만, 법인 이익의 유효세율은 약 17%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경제 성장의 과실이 세금을 많이 내는 '노동(임금)'에서 세금을 적게 내는 '자본(기업 이익)'으로 이동하는 경우, GDP가 아무리 성장해도 정부가 거둬들이는 세금의 총량은 늘어나지 않는 '세수 탄력성 저하'가 발생한다는 것이다.끈적한 금리세수가 부족해진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빚을 내는 것이다. 국채 발행이다. 늘어난 국채는 거시경제의 리스크 중 하나인 '고금리의 고착화'로 이어질 수 있다. 미국 의회예산국(CBO)의 장기 전망에 따르면 2025년부터 2055년까지 미국의 평균 재정적자는 GDP의 6.3%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공공부채는 2055년 GDP의 156%까지 증가할 전망이다. 적자를 메우기 위해 미 재무부가 국채를 시장에 쏟아내면 투자자들은 이 물량을 소화해 주는 대가로 더 높은 금리(프리미엄)를 요구할 것이다. 인플레이션 둔화에도 시장 금리가 좀처럼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
석학도 이런 상황을 경고하고 있다. 제롬 파월 미 중앙은행(Fed) 의장은 "AI는 사용하는 사람들의 생산성을 높여주지만, 다른 사람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만 할 수도 있다"며 "우리는 아직 이런 사회적 비용과 노동 시장의 함의를 다룰 도구를 갖추지 못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은 '반도체 슈퍼사이클' 덕분에 세금이 잘 걷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은 전 세계적인 AI 서버 증설 경쟁의 최대 수혜국이었다.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 폭발 등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기록적인 실적을 냈다. 두 기업이 올 3분기까지 납부한 법인세 총액은 6조 2310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9배 가까이 급증했다.
그러나 전체 나라 살림은 여전히 대규모 적자다. 기획재정부는 2025년 국세 수입이 당초 예산안(382조 4000억원)보다 12조 5000억원 부족한 369조 9000억원에 그칠 것으로 추계했다. 원인은 '디커플링'이다. 반도체 수출 대기업은 돈을 벌었지만, 낙수효과가 내수 경기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금리와 고물가로 내수가 얼어붙으면서 부가가치세 수입이 예산 대비 6조 7000억원 덜 걷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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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