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리와 손 잡더니…'매운맛' 위스키 해외서 일냈다

입력 2025-12-25 16:37
수정 2025-12-26 02:24

한국 최초의 싱글 몰트위스키 브랜드 기원이 K위스키 신화를 써나가고 있다. 세계 3대 주류 품평회 중 두 곳에서 연이어 최고상을 받으며 세계 위스키 업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지난 1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닛코호텔에서 열린 ‘샌프란시스코 세계주류경연대회(SFWSC) 2025’ 시상식. 무대에 태극기가 펼쳐지자 객석에서 환호와 기립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날 ‘기원(Ki-One)’은 대상에 해당하는 ‘베스트 오브 클래스’를 수상했다. SFWSC는 매년 70여 개국에서 2500여 종의 주류가 출품된다. 부문별로 5개 최종 후보를 선정해 엄격한 블라인드 테스트를 거쳐 단 하나의 제품에 ‘베스트 오브 클래스’ 트로피를 수여한다. 이 치열한 경쟁에서 우리나라 위스키가 가장 높은 곳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기원과 맞붙은 경쟁자 가운데는 최근 위스키 시장을 휘젓고 있는 대만의 ‘카발란’과 인도의 ‘암룻’도 포함돼 있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아니다. 두 달 전인 9월에도 영국 ‘국제와인&스피릿대회(IWSC) 2025’ 월드와이드 위스키 부문 대상 메달을 받았다. 같은 해에 SFWSC와 IWSC를 모두 석권한 것은 세계 위스키 역사상 전례를 찾기 힘든 일. 그것도 최단 기록이었다. 기원을 이끄는 인물은 도정한 대표다. CNN, 아리랑 TV, 마이크로소프트 등 세계 유명 언론 및 정보기술(IT) 기업에 다니다 2014년 수제맥주회사인 핸드앤몰트브루잉컴퍼니를 설립했고 2018년 세계 최대 맥주회사인 AB인베브에 매각했다. 2020년 경기 남양주시 백봉산 자락에 기원 위스키 증류소를 세우면서 무모한 도전을 시작했다. 위스키는 오랜 시간 스코틀랜드 등 일부 국가의 전유물처럼 여겨졌고,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도전한 일본조차 세계의 인정을 받기까지 70여 년이 걸렸다. 사람들은 그에게 “미쳤다”고 했다.


남양주 기원 증류소에서 만난 도 대표는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의 기후에서 해답을 찾았다”고 했다. 위스키 양조장을 세울 최적의 입지를 찾기 위해 전국을 다닌 그는 남양주의 깨끗한 수질과 극심한 연교차에 주목했다. 여름에는 40도 가까이 오르고 겨울에는 영하 20도까지 떨어진다. 그는 “극단적인 온도 차이가 오크통의 팽창과 수축을 빠르게 해 숙성 속도를 앞당긴다”며 “스코틀랜드에서 4년간 숙성해야 구현할 수 있는 맛을 1년이면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여기에 40여 년 경력의 스코틀랜드 출신 마스터 디스틸러 앤드루 샌드가 손을 보탰다. 16세에 위스키업계에 뛰어들어 스코틀랜드 글렌리벳과 일본 닛카 증류소 등에서 경험을 쌓은 그는 현존하는 최정상급 디스틸러 중 한 명이다.

기원 위스키의 특징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한국의 매운맛’이다. 한식, 정확히는 도 대표와 샌드가 함께 제육볶음을 먹다가 착안했다는 기원만의 캐릭터는 도 대표가 수제 맥주를 만들 때부터 강조해 온 ‘한국적인 맛’의 연장선에 있다. 지난해 12월 기원은 넷플릭스 예능 ‘흑백요리사’로 유명해진 에드워드 리 셰프와 협업해 국내산 홍고추의 매운맛을 담아낸 ‘기원 레드페퍼 캐스크’를 출시했다.


▷축하한다. 세계 3대 주류 품평회 가운데 SFWSC와 IWSC에서 연이어 최고상을 받았다.

“골드나 실버는 여러 차례 수상했지만 최고상은 처음이다. 기원 위스키 증류소를 설립하며 나름의 계획을 세웠는데, 이런 상은 2030년쯤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5년 만에 이뤄내다니 아카데미나 그래미에서 작품상을 받은 것만큼 기쁘다. ‘한국적인 위스키’가 세계 무대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한 것이 가장 뜻깊다.”

▷시상식에서 태극기를 든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국제대회와 위스키페스티벌에 나갈 때마다 태극기를 챙긴다. 다른 증류소들도 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 나만 들고 있더라. 처음엔 소매에 숨겨두고 눈치를 봤다. 이름이 불리고 태극기를 펼치자 객석에서 기립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중에 들어보니 여러 증류소에서 ‘내년엔 우리도 국기를 준비하자’는 말이 오갔다고 한다.”(웃음)

▷심사평 가운데 특히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면.

“‘Pleasantly surprised!’라는 평가다.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는 뜻인데, 굉장히 인상 깊었다. ‘잊지 못할 위스키’라는 평도 기억에 남는다. 요즘 가장 뿌듯한 순간은 수상 이후 해외 위스키페스티벌이나 위스키쇼에서 다른 증류소 관계자들이 우리 부스를 찾아 줄을 설 때다. 보통 이런 자리에서는 정말 소문난 위스키만 찾아 시음한다.”

▷SFWSC에서는 ‘기원 시그니처’가, IWSC에서는 ‘기원 유니콘’이 수상했다.

“올해 출시한 기원 유니콘은 부드러운 피트 위스키다. 라프로익이나 아드벡처럼 강렬하게 몰아치는 아일라 위스키와는 결이 조금 다르다. 곧 나올 기원 시그니처는 셰리 오크통과 와인 오크통에서 숙성한 원액을 블렌딩한 제품이다. 셰리 위스키 특유의 단맛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맥아와 오크, 과일 향이 정교한 균형을 이룬다.”

▷기원 위스키만의 특징은 무엇인가.

“기원 위스키의 맛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한국의 맛’이다. 기원 위스키는 스파이시한 풍미를 기본으로 한다. 끝맛이 고추장처럼 매콤달콤하다. 입안을 톡 치고 지나가는 펀치감도 느껴진다. 일본 위스키가 미소 된장국처럼 차분하고 은은하다면 기원 위스키에서는 된장찌개처럼 다채롭고 또렷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에드워드 리 셰프와 파격적인 위스키를 선보였다. 위스키와 홍고추의 조합이라니.

“디스틸러인 샌드는 전통시장에서 영감을 많이 얻는 편이다. 어느 날 술 만드는 데 쓰겠다며 홍고추 두 포대를 사왔다. 가장 매운 고추를 달라고 했다더라. 원래 진을 만들 때 쓰려던 재료였는데, 위스키에 조합하니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위스키에 홍고추의 풍미는 어떻게 입혔나.

“세계 최초로 시도한 ‘고추 캐스크 시즈닝’ 공법을 적용했다. 손으로 부순 홍고추를 뜨거운 물과 함께 오크통에 담아 통 자체에 고추의 향을 입힌 뒤 그 물을 비우고 위스키 원액을 채워 3년간 숙성했다. 혀를 자극하는 강한 매운맛보다는 위스키 본연의 달콤한 바닐라향 뒤로 피니시에서 은은하게 올라오는 알싸한 ‘킥(kick)’을 구현하는 데 집중했다. 불닭볶음면의 매운맛과 비교하는 반응도 많다.”

▷2026년 기원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

“스코틀랜드나 일본 위스키를 흉내 내는 것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기원 시그니처와 더불어 8~9종의 한정판 위스키를 출시할 텐데, 여러 한국적인 요소를 접목할 계획이다. 일본과 영국 등 15개국에 수출하고 있으며 프랑스 인도네시아 호주 등과 협의 중이다. 한국 문화의 인기로 우리 술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는데, ‘기원=K위스키’라는 인식이 확립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계 3대 주류 품평회 중 나머지 하나인 ‘인터내셔널스피릿챌린지(ISC)’에서도 최고상을 받는 것이 목표다.”

남양주=이승률 기자/사진=이수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