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고백…사랑을 춤추다, "마린스키의 줄리엣 기대하세요"

입력 2025-12-24 17:47
수정 2025-12-24 23:51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거점으로 하는 마린스키 발레단은 세계 발레계의 정점으로 꼽힌다. 그 중심에서 꾸준히 존재감을 드러내온 일본인 발레리나 나가히사 메이(25·사진)가 있다. 마린스키 발레단 퍼스트 솔리스트인 그는 내년 1월 3~4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열리는 갈라 공연 ‘더 나잇 인 서울’을 통해 처음으로 한국 관객과 만난다.

이번 무대에서 선보일 작품은 ‘차이콥스키 파드되’와 ‘로미오와 줄리엣 파드되’. 지난 22일 ‘호두까기 인형’ 공연을 막 마친 나가히사와 전화로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도 이번이 처음이다.

“어제 ‘호두까기 인형’의 주인공 마샤(러시아에서는 클라라나 마리 대신 ‘마샤’라는 이름을 쓴다)로 춤을 췄어요. ‘호두까기 인형’을 공연해야 비로소 ‘아, 겨울이 왔구나’하고 실감하게 됩니다.”

러시아로 건너온 지 9년 차. 나가히사는 거의 매일 무대에 올랐다. 고전 발레부터 드라마 발레, 현대 발레까지 매일같이 다른 레퍼토리가 그의 시간을 채웠다. “마린스키에서는 연습 방식도, 파트너도 늘 바뀌어요. 몸과 마음을 항상 새롭게 조율해야 하는 환경이죠.”

바가노바 발레의 전통을 잇는 마린스키 발레단과의 인연은 만 15세에 찾아왔다. 모나코 발레 학교 재학 중 만난 유리 파테예프 전 마린스키 예술감독(현 발레 마스터)은 나가히사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봤다. 2017년 마린스키 발레단에 견습생으로 입단한 그는 2018년 18세의 나이에 세컨드 솔리스트로 정식 입단했다.

그가 무용수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지금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수석무용수라는 다음 단계가 눈앞에 있지만 그는 승급 자체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 “제가 생각한 발레의 미학과 스타일이 마린스키 발레단에 모두 있어요. 이곳에서 춤춘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힘이 됩니다.”

데뷔 초와 비교해 가장 달라진 점으로 그는 익숙함을 꼽았다. 러시아의 언어와 문화가 모두 낯설던 시절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이었다. 5년 차를 넘어서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리듬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지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작품도 있다. 바로 ‘지젤’. “무대에 오르면 오를수록 어려워지는 작품이에요. 발레 테크닉을 위주로 보여주는 2막보다 지젤의 활기찬 모습과 매드신이 어우러지는 1막이 시간이 흐를수록 훨씬 어렵게 느껴집니다. 춤만큼이나 연기와 마임을 제대로 해야 하는 장면이 많아요.”

가장 애착을 갖는 역할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이다. 그래서 이번 서울 공연에서도 이 작품의 파드되를 선택했다. 마린스키 발레단은 라브롭스키 버전의 안무를 따르는데, 춤과 연기가 정확히 반반을 차지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 “말이 아니라 몸으로 이야기를 전달해야 하는 역할이에요. 전막이든 갈라든, 관객을 ‘로미오와 줄리엣’의 서사 속으로 끌어들이는 데 늘 많은 고민을 합니다.” 서사가 없는 ‘차이콥스키 파드되’는 또 다른 도전이다. 음악만으로 감정을 끌어올려야 하는 작품으로, 기술과 순수한 에너지로 무용수의 존재를 드러내야 한다.

이번 공연이 특별한 이유는 또 있다. 마린스키 무대에서는 동양인 무용수끼리 주역 파트너로 설 기회가 거의 없는 반면 갈라 공연에선 마음 맞는 동료들끼리 춤을 출 수 있어서다. “한국인 발레리노 전민철과도 함께 춤추고 싶었는데 그 기회가 빠르게 찾아왔다”며 “한국 관객의 열정적 박수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