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암 커지기 전에 막는다"…조기 표적 치료 단서 나와

입력 2025-12-24 10:22
수정 2025-12-24 10:37


국내 연구진이 위암이 발생하는 초기 과정을 규명해 기존 항암치료 패러다임을 바꿀 연구 성과를 공개했다. 위암 치료 시점을 훨씬 앞단으로 당길 수 있는 단초 마련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기초과학연구원(IBS) 유전체 교정 연구단은 위암 발생 초기 단계에서 암세포가 주변 환경의 도움 없이 스스로 성장 신호를 만들어 증식하는 과정을 규명했다고 24일 밝혔다. 위암 세포가 어떻게 자율적으로 성장하는지는 그동안 명확히 규명되지 않아 오랜 난제로 남아 있었다. 이번 성과가 위암 발병 초기 단계를 겨냥한 새로운 치료 전략을 제시할 수 있다는 의미다.

위암은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특히 흔하게 발생하지만 분자적 특성과 성장 기전은 주로 서양에서 발병률이 높은 대장암 연구에서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연구됐다. 대장암의 경우 특정 유전자 돌연변이를 통해 세포의 성장과 증식을 조절하는 '윈트(WNT)' 신호가 지속적으로 활성화되는 것이 잘 알려져 있지만 위암에서는 이러한 돌연변이가 드물어 암이 어떤 경로를 통해 성장하고 유지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설명이 어려웠다.

연구진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위암이 발생하는 전암 단계(아직 암으로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암으로 발전할 수 있는 분자적 변화를 이미 획득한 상태) 세포에 주목했다. 연구진은 정상 위 점막 세포와 전암 단계의 위 점막 세포를 비교할 수 있는 생쥐 모델과 오가노이드 모델을 구축하고, 세포 성장에 필요한 외부 신호를 하나씩 제거하는 방식으로 실험을 설계했다. 그 결과 정상 위 점막 세포는 외부 신호가 차단되면 성장이 멈춘 반면 전암 단계의 세포 가운데 특정 유전자 변이를 가진 세포는 외부 도움 없이도 성장을 지속했다.

이 차이를 추적한 결과, 위암 환자의 약 3분의 1에서 발견되는 KRAS 또는 HER2 유전자 변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들 변이가 활성화되면 세포에 성장신호를 전달하는 MAPK 신호 경로가 과활성화되고 이 신호가 다시 위 점막 상피세포에서 WNT 신호 분자의 발현을 유도했다. 암 발생 초기에는 암세포가 이 신호를 스스로 만들어내면서 더 이상 암세포를 둘러싼 신호 환경인 ‘미세환경(niche)’에 의존하지 않아도 증식할 수 있는 상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연구진은 이어 이 메커니즘이 실제 환자에서도 적용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위암 환자 유래 오가노이드를 이용한 검증 실험을 진행했다. 세브란스병원과 독일 드레스덴 의과대학과의 국제 공동연구를 통해 확보한 환자 유래 세포에서도 생쥐 모델에서 확인한 신호 변화가 동일하게 나타났다. 특히 KRAS 또는 HER2 변이를 가진 환자 샘플에서 암세포가 외부 신호 없이도 성장할 수 있는 특성이 뚜렷하게 관찰됐다. 동물 모델에서 규명한 기전이 실제 인간 위암에서도 작동한다는 의미다.

연구 결과는 지난 16일 국제학술지 ‘몰레큘러 캔서’에 발표됐다. 논문의 교신저자인 이지현 연구위원은 “이번 연구는 위암이 발생하는 초기 단계에서 암세포가 어떻게 성장 환경으로부터 독립하는지를 실험적으로 규명한 첫 사례”라며 “암세포가 자율적인 성장을 획득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신호 경로를 밝혀냄으로써 위암의 초기 발병 단계를 겨냥해 차단하는 새로운 항암 치료 전략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라고 말했다.

이영애 기자 0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