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작업용 로봇 시장 1위 업체인 ‘화낙(영어명 FANUC)’이 일본 증시의 블루칩으로 부상했다. 주력상품인 공장용 생산기계의 업황 회복과 함께 엔비디아와의 피지컬AI(인공지능 조작 로봇) 개발 협력 소식에 투자가 몰리고 있다. 산 속 마을에 숨어든 '세계 1위 로봇기업'23일 도쿄증권거래소에 따르면 화낙은 최근 1달 간 22.32% 급등했다. 6개월 사이 주가는 58.7% 상승하며 같은 기간 닛케이225 지수(31.44%)를 두배 가까이 앞질렀다.
화낙은 전세계 산업용 로봇 및 공작기계 분야의 선두주자다. 1958년 후지쯔 공작 기계 부문 사내 벤처로 출발해 1972년 스핀오프 후 약 50년만에 공장 자동화(FA)와 로봇, 공작기계 등 주요 부문에서 모두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중국 경쟁자들의 물가 공세에도 화낙은 독보적인 기술력을 바탕으로 각 분야의 최첨단 제품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애플의 아이폰과 삼성전자의 갤럭시, 테슬라의 전기차는 모두 화낙의 절삭 기계와 공정 로봇이 없으면 만들어질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화낙은 글로벌 제조업체 가운데선 비교군을 찾기 어려울 정도의 ‘쇄국 정책’으로도 유명하다. 본사와 핵심 생산시설은 도쿄로부터 3시간 거리에 위치한 후지산 기슭의 야마나시현 미나미쓰루군 오시노촌(한국의 읍)에 위치해 있다.
지리적 고립과 함께 언론은 물론 증권사 애널리스트와 주주들의 방문도 극소수 사례를 제외하곤 금지하는 정책으로 인해 회계감사 자료와 실적 보고서를 제외하곤 공개되는 정보 자체가 극도로 제한적이다. ‘디지털 갈라파고스’로 유명한 일본에서도 화낙은 2023년에서야 사내 업무 시스템을 전자화한 진정한 '쇄국기업'으로 꼽힌다.'화낙 로봇' + '엔비디아 반도체'는 '차세대 지능형 로봇'이처럼 로봇 업계의 ‘은둔 고수’인 화낙이 지난 1일, 엔비디아와의 협력을 발표하자 일본 산업계와 자본시장은 크게 놀랐다. 두 회사는 화낙의 로봇과 엔비디아의 첨단 AI컴퓨팅 반도체를 조합하고 공동 기술 개발을 추진하기로 했다. 화낙의 산업용 로봇에 인공지능을 탑재해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고 함께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차세대 지능형 로봇을 개발하는 게 목표다.
기존 작업용 로봇은 사전에 코딩된 작업을 수행하는 역량만을 보유했다. 두 회사의 구상은 화낙의 로봇이 엔비디아가 제공하는 가상공산 서비스에서 시뮬레이션을 통해 AI모델을 학습시키고, 이를 기반으로 현실 세계의 물리법칙을 이해하고 로봇을 제어하는 ‘피지컬 AI’를 구현하겠다는 것이다.
화낙은 엔비디아와의 협력 소식과 함께 오픈소스 로봇 개발 플랫폼에서 자신들의 로봇을 제어할 수 있는 드라이버를 개발자 커뮤니티인 ‘깃허브’에 공개하기도 했다. 엔비디아와의 협력과 별개로 다수의 기업들이 추진하고 있는 피지컬AI 연구가 시장 1위 업체인 자신들의 제품을 기반으로 진행되도록 유도하기 위한 조치다.
극단적 폐쇄성을 고수하던 화낙이 외부 협력을 확대하며 공세적으로 나선 건 로봇 산업이 AI와 만나 완전히 새로운 규모의 피지컬AI 시장으로 개화할 것이란 기대감과, 경쟁 업체들의 행보에 대한 경계감 때문으로 분석된다.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 그룹은 올해 10월, 오픈AI에 225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동시에 54억7500만달러를 투입해 스위츠 기업 ABB의 로봇사업부를 인수했다. ABB는 로봇 2시장 2위 업체로, 화낙의 최대 경쟁자다.
손 회장은 “소프트뱅크는 ABB 로봇 사업부와 함께 AI초지능과 로보틱스를 융합하는 공동의 비전을 추구할 것”이라며 “인류를 발전시킬 획기적 진화를 이끌겠다”고 밝혔다.
트럼프 2기조차 호재...매년 10%대 성장주가를 움직이는 건 피지컬 AI라는 ‘장밋빛 미래’만이 아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올해와 내년 실적 전망도 탄탄하다. 화낙은 지난 2025회계연도 상반기(올해 4~9월)에 매출 4076억엔, 영업이익 860억엔을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영업이익이 13.71% 급증했다.
화낙은 실적 발표 자료를 통해 “공작 기계 부문이 중국에서 크게 성장했고, 로봇 부문도 중국과 미주 대륙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수요 개선을 확인했다”며 “그 결과 공장 가동률이 개선돼 영업이익률이 전년 동기 대비 1.6%포인트 상승한 21.1%로 집계됐다”고 설명했다.
역사적으로 화낙은 기업들이 설비투자를 확대하는 시기에는 매출이 성장하고, 반대의 경우에는 실적이 급락하는 경기 민감주의 모습을 보여왔다. 하지만 올들어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과 함께 세계 각국이 자체 공급망 강화에 나서면서 침체기에도 성장하는 새로운 면모를 보였다는 평가다.
상대적으로 경기 전망이 밝고, 공급망 재편 흐름이 여전한 내년의 실적은 보다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금융정보업체 블룸버그에 따르면 화낙은 올해 영업이익 1588억엔에서 내년 1790억엔, 2027년 1992억엔으로 매년 10% 안팎의 성장이 예상된다.
피지컬AI 효과 어디까지? 34배 PER '가성비'는 논쟁거리최근 주가 급등으로 인해 치솟은 밸류에이션(실적 대비 주가 수준)은 월가 내부에서도 논쟁의 대상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월가 26개 투자은행(IB)가 제시한 목표주가 평균은 현재가 대비 1.73% 낮은 5759엔이다. 15개 기관이 매수, 10개 기관이 보유, 1개 기관(골드만삭스)는 매도를 제시했다.
추가적인 상승을 주장하는 진영은 화낙이 단순 로봇 제조업체가 아닌, AI가 바꿀 경제 산업 구조의 핵심 플레이어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목표주가 7000엔을 제시한 JP모간이 대표적이다.
마루야마 타츠야 JP모간 애널리스트는 “화낙은 현재 공장 가동률이 75%로 집계되는데, 공장 신설과 같은 공격적인 전망을 배제하고 AI탑재 로봇을 향한 수요가 기존 공장 가동률을 100%로 끌어올린다는 보수적인 가정만 더해도 연간 순이익이 600억엔 증액된다”며 “7000엔의 목표주가 역시 관세 리스크 해소로 인한 자기자본비용 0.2%포인트 개선과 피지컬AI 시장 진출로 인한 순이익 성장률 0.5%포인트 상승을 반영한 보수적 추정”이라고 말했다.
반면 시장 반대편의 신중론자들은 화낙이 기계설비 제조사로선 전례없는 수준의 높은 밸류에이션을 이미 부여받고 있어 상승 여력이 제한적이라고 경고한다. 화낙의 주가수익배율(per)은 23일 종가 기준 34.9배로 집계된다.
아이리스 정 도이체방크 애널리스트는 “화낙이 현재 보여주고 있는 실적만으론 역사적인 per 평균값 30.7배를 추가적으로 뛰어넘을 것이라고 보긴 어렵다”며 “경영진이 상반기 실적 발표에서 하반기 주문량이 상반기와 동일한 수준일 것이라고 말한 점을 고려하면 추가 상승을 위한 재료가 제한적인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도이체방크는 보유 의견과 함께 목표주가 5300엔을 제시했다.
전범진 기자 forwar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