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이하 뉴스쇼)를 16년간 이끌어온 김현정 앵커의 전격 하차 소식에 보수 진영에서 이재명 정부의 '외압설'을 제기하고 나섰다. 당사자가 직접 "외압은 없다"며 진화에 나섰음에도 좀처럼 의구심은 거둬지지 않는 분위기다. 이는 우리가 이미 수차례 '스피커'들이 권력에 눈치보던 끝에 마이크를 내려놓는 장면을 목격해왔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대통령 저격 때문에 하차?"…음모론에 진땀
김 앵커는 지난 22일 뉴스쇼에서 보수 진영 일각에서 제기한 외압설을 직접 일축했다. 그는 "실은 제가 직접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소문이 너무 빨리 퍼지는 바람에 하차 이유가 담기지 않은 기사가 먼저 나가버렸다. 가짜 뉴스들이 엄청 돌아서 피곤하다"면서 체력과 진로 문제 등으로 하차했다고 설명했다.
김 앵커가 직접 자신의 하차 이유를 명확히 한 것은 국민의힘에서 불을 지핀 정부의 외압설이 일파만파 퍼졌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박정훈 의원은 지난 21일 페이스북에서 "김 앵커가 마이크를 내려놓는다고 한다. 각자의 사정도 있겠지만, 이재명 대통령이 대놓고 저격했던 앵커였기에 하차 과정의 속사정이 궁금해진다"고 음모론에 군불을 땠다.
장예찬 여의도연구원 부원장도 "혹시라도 이재명 대통령의 저격이 진행자 교체의 이유는 아니었으면 좋겠다"며 "대통령 후보 시절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유력 대선주자가 특정 프로그램을 콕 집어서 저격하는 것은 처음 봤다"고 강조했다. 이들의 언급은 이 대통령이 지난 2월 민주당 대표 시절 페이스북에 뉴스쇼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공개적으로 드러냈다가 삭제한 전례를 겨냥한 것이다.
당시 이 대통령은 2024년 8월 28일 자 뉴스쇼 방송 편집 영상 링크를 공유하면서 "이런 악의적 프레임이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뉴스쇼가 대체 민주당과 이재명에게 왜 이렇게 심하게 하나 했더니…"라고 썼다. 공유한 영상에는 한 정치평론가가 "대통령실과 여당이 야당을 상대하는 관계는 과거에 북한을 상대하는 미국과 대한민국 정부와 비슷하다"면서 윤석열 전 대통령을 미국,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를 한국, 이 대통령을 북한에 비유한 내용이 담겼다.
이 대통령의 이른바 '좌표 찍기' 후 뉴스쇼 측에는 민주당 강성 지지층의 비난 댓글이 쇄도했다. 정치권에서도 당시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였던 이 대통령의 언론관에 대한 우려가 쏟아졌고, 이 글은 '실무진의 실수'라는 민주당의 설명과 함께 곧 삭제됐다. 다만 이 대통령은 이후 같은 달 MBC '100분 토론'에서 "(뉴스쇼가) 이재명은 북한이라고 했는데, 그건 팩트 왜곡이다. 이재명에 대한 종북몰이"라고 재차 지적했다.◇ MB 정부 김제동부터 尹 정부 주현영까지 '데자뷔'
김 앵커가 직접 이런 주장을 일축하면서 논란은 사그라들 것으로 예상됐으나, 여전히 보수 지지층은 기정사실로 여기는 듯한 반응이 더러 포착된다. 이처럼 정치권력이 불편해하는 목소리를 지우려 한다는 의혹은 사실 한국 정치사의 오래된 레퍼토리다. 과거 MB(이명박) 정부 시절에서의 방송인 김제동의 '스타 골든벨' 하차부터 윤석열 정부 시절 방송인 주현영의 SNL 코리아 출연 중단, 그리고 이재명 정부인 오늘날까지 반복되고 있다.
2000년대 대표적인 방송인 외압 논란을 꼽는다면 진보 성향으로 알려진 가수 윤도현과 방송인 김제동의 KBS 프로그램 하차 사례가 거론된다. 먼저 윤도현은 2002년 첫 방송을 시작으로 7년간 진행하던 KBS 음악 프로그램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 2008년 전격 하차를 선언했다. 이를 두고 당시 대중들 사이에서는 윤도현이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등 이명박 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을 밝혀온 것이 진짜 이유라는 취지의 외압설이 횡행했다.
2009년 김제동의 KBS '스타 골든벨' 하차는 특히 정치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2005년부터 해당 방송을 진행해온 김제동은 10% 안팎 시청률을 기록하는 등 양호한 성적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2009년 돌연 하차 통보를 받았다고 밝혀 충격을 안겼다. 이 역시 김제동의 드러난 진보 성향이 원인이 됐다는 의심의 눈초리가 잇따랐다. 이때 김부겸 민주당 의원은 "김제동을 갑자기 하차시키는 것은 명백한 정치 탄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진보신당은 "김제동이 소신 발언을 한 것이 정권의 미움을 받아 그만두게 된 것으로밖에 해석할 수가 없다"는 논평을 냈었다.
최근에는 배우 주현영의 쿠팡플레이 오리지널 'SNL코리아' 하차가 무수한 뒷말을 낳았다. 주현영은 윤석열 정부 시절인 2024년 하차를 선언했는데, 그가 방송에서 김건희 여사를 풍자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취지였다. 주현영은 해가 바뀐 지난 6월 기자들과 만나 "(외부) 영향을 받은 건 없었다"며 "연기를 하며 겁이 안 난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사실 그 안에서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고 해명까지 해야 했다.◇ "자발적 하차"라지만…대중들 의혹 여전
이렇듯 과거와 현재 모두 외압설에 휩싸인 인사들은 '자발적 하차'라는 입장을 내고 있지만, 대중은 이를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워한다. "외압으로 물러나는 사람이 어떻게 외압이라고 실토하겠느냐"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의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전 시사 라디오 진행자는 "나 역시 외압에 의해 물러나면서도 공식적으로는 '외압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이 있다"고 털어놨다.
외압설이 과대망상이 아니라는 점은 최근 역사적 사실로도 증명됐다. 바로 이명박 정부 당시 발생한 소위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재판에서다. 법원은 지난 10월 개그우먼 김미화 등 방송인 36명이 이명박 전 대통령,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 배상 책임을 최종 확정했다. 국정원은 공식 사과문을 내고 "국민이 부여한 권한을 남용한 과거를 깊이 반성하고, 신뢰받는 기관으로 거듭나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전문가들은 정권을 막론하고 반복되는 외압설의 배경에는 우호적인 여론 지형을 구축하려는 권력의 속성과 방송사의 선제적인 '자기검열'이 맞물려 있다고 분석한다. 신율 명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정부가 우호적인 방송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교과서에도 나오는 이야기"라면서 "외압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방송사 스스로 권력의 기류를 읽고 알아서 (자기검열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진단했다.
의혹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양당의 태도에 대한 비판도 제기된다. 김영익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객원교수(정치학 박사)는 "하차의 실체는 시간이 흐른 뒤 당사자가 밝히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영역임에도, 우리 정치는 모든 사안을 진영 논리에 따라 지나치게 정치화하고 있다"며 "보수와 진보 양당 모두 자신이 야당일 때는 '정부 외압'이라 공격하다가도, 여당이 되면 '블랙리스트가 어디 있느냐'며 입장을 손바닥 뒤집듯 바꾼다. 이런 정치권을 과연 국민이 신뢰할 수 있겠느냐"고 강조했다.
홍민성 한경닷컴 기자 m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