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가장 사적인 선택이자, 가장 치열한 계산입니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사랑의 언어 뒤편에서 가문과 자산에 대한 셈이 오갑니다. 사랑에 들뜬 연인은 몰라도 주변에서 치밀한 수싸움을 벌일 수도 있고요. 오늘날 '반반결혼'이나 '퐁퐁남' 따위의 말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것만 봐도 그렇죠. 딸이면 유산 상속조차 받지 못했던 19세기 영국에서는 오죽 했을까요. 당시 결혼은 여성의 경제적 조건을 결정하는 지배적 변수였습니다.
'재산 많은 남자는 내 딸의 재산'
"재산이 많은 미혼 남성이라면 반드시 아내를 필요로 한다는 말은 널리 인정되는 진리이다. 그런 남성이 동네에 처음 들어서면, 그 사람이 어떤 기분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는 상관 없이, 동네 사람들 마음속에 너무 깊이 박혀 있는 이 진리 때문에 그는 당연히 여러 집안의 딸들 가운데 하나가 차지해야 할 재산으로 간주된다."
제인 오스틴의 장편소설 <오만과 편견>은 '결혼은 로맨스 이전에 재산 문제'라고 선언하며 시작합니다. 이 소설은 탄생 250주년을 맞은 오스틴의 대표작이에요. 1796년 '첫인상'이라는 제목의 초고로 출발했으나 출간 거절과 개고 끝에 1813년 세상에 나왔습니다.
200년이 넘은 작품인데 드라마, 영화로 계속해서 만들어질 정도로 사랑받고 있어요. 인기를 증명하듯 배우 콜린 퍼스가 동명의 BBC 드라마에서 입었던 셔츠는 지난해 경매에서 2만 파운드(한화 약 3400만원)에 팔렸고, 넷플릭스는 이 소설을 또다시 6부작 드라마로 제작 중입니다. 영미권에서는 '제이나이트(Janeite·제인 오스틴 지지자란 뜻으로 그녀의 열렬한 팬을 뜻함)' '오스틴 현상'이라는 말도 자주 쓰여요.
'결혼, 그리고 연인에 대한 오해와 이해'라는 젊은 여성들의 화두를 담고 있어요. 시대를 떠나 공감을 부릅니다. 마치 한 여성이 상반된 조건의 두 남자 사이에서 결혼 상대를 고민하는 내용의 소설, 양귀자의 <모순>이 1998년 출간 이후 250쇄 이상 찍으며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은 것처럼요.
베넷家 둘째딸의 남편 찾기 소동
소설의 주인공은 엘리자베스 베넷. 베넷 가문의 다섯 딸 중 둘째입니다. 고분고분한 아가씨가 아닙니다. 총명하고 명랑해요. 자신을 향한 무례한 말은 재치 있게 받아칠 줄 아는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하지만 어머니인 베넷 부인은 '혼기가 찬' 첫째 제인과 까칠한 엘리자베스의 신랑감을 찾느라 고민이 깊습니다. 그러던 중에 젊고 부유한 신사 찰스 빙리가 옆마을 네더필드에 이사 오자 온 마을이 술렁이죠. 빙리와 그의 친구 다아시는 딸을 둔 가문들의 은근한 구애 대상이 됩니다.
작품의 배경은 19세기 영국. 여성의 청혼 거절은 아양으로 오해받고, 딸만 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 딸이나 아내가 아니라 가까운 남자 친척에게 유산이 상속되는 '한정 상속' 제도가 있던 시절이죠.
엘리자베스의 '남편감 찾기' 과정은 사회적 제약에 갇혀 있던 당대 여성이 결혼과 계급에 대한 고민을 통해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아버지의 한정 상속자로 예정된 자신의 사촌이자 목사인 콜린스의 청혼을 단칼에 거절합니다. 콜린스는 비어 있는 '목사 사모' 자리를 채우기를 원할 뿐 엘리자베스에 대한 갈망은 전혀 없었거든요.
엘리자베스에게 매료된 다아시 역시 청혼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가 오만하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거절해요. 하지만 이후 오해를 풀게 되죠. 다아시는 엘리자베스의 동생 리디아가 장교 위컴과 야반도주하는 '사건'을 조용히 수습하며 베넷 가문의 명예를 지켜줍니다. 그의 진심과 배려를 알게 된 엘리자베스는 다아시에 대한 편견을 씻어내고, 두 사람은 결혼에 이릅니다.
결혼으로 단숨에 신분상승을 하는 신데렐라 이야기와는 다릅니다. 당대 여성 독자들은 사랑이나 결혼 앞에 '오만할 권리'를 박탈 당했습니다. 소설 속 베넷 부인은 딸이 자꾸 청혼을 거절하자 걱정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누가 너를 먹여 살린단 말이냐?" 이런 현실 앞에 독자들은 사랑과 조건을 모두 잡은 엘리자베스를 보며 간신히 대리 만족을 했겠지요. 엘리자베스의 친구 샬럿은 생활을 보장받기 위해 전혀 사랑하지 않는 콜린스와 결혼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자긍심을 희생하지 않은 채 사랑과 행복,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얻습니다.
오만과 편견, 즉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은 통찰은 이 소설에 여전히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허영심과 오만은 매우 달라. 종종 동의어처럼 쓰이긴 하지만. 허영심에 들뜨지 않아도 오만할 수 있어. 오만은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더 연관되어 있거든. 허영심은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것과 상관이 있고."
평생 독신으로 산 로맨스 여왕
제인 오스틴이 남긴 작품 대부분은 결혼을 둘러싼 욕망과 셈법을 다뤘습니다. 정작 자신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어요. 당시로서는 아주 드물게 소설가로서 활동한 여성입니다. 소설 <에마> <이성과 감성> 등을 남겼습니다.
1775년 12월 16일 영국 햄프셔주 스티븐턴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난 오스틴은 정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고전을 탐독하며 어려서부터 소설 습작을 즐겼어요. 소설을 책으로 내기까지는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쳤습니다. 한때 친척집을 전전하기도 했고요. 이 과정은 다시 그녀의 소설에 녹아들었습니다. 예컨대 소설 <설득>의 배경이 된 도시 바스(Bath)가 그렇지요. 오스틴이 약 5년간 머물렀던 바스에서는 매년 9월 그녀의 작품과 생애를 기념하는 축제가 열립니다.
올해 오스틴의 탄생 250주년을 기념해 그에게 영향을 끼친 작가들을 탐구한 <제인 오스틴의 책장>을 비롯해 <디어 제인 오스틴: 젊은 소설가의 초상> <제인 오스틴을 처방해 드립니다> 등 관련 서적이 줄지어 출간되고 있습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