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원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장이 22일 정부의 재정지출 증가가 증세 등 재정확보 계획없이 이뤄지면 국민들이 '물가라는 세금'을 내게 된다고 지적했다. 공공부채를 일으켜 재정을 쓰는 방식이 계속되면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려도 물가가 더 상승하는 악순환이 나타날 것이라는 우려도 내놨다.
이 원장은 이날 서울 연세로 연세대 대우관에서 열린 국제경제학회 동계학술대회에서 '고(高) 공공부채 시대의 금리와 물가'를 주제로 특별 강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원장은 최근 전세계적으로 대부분 국가에서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가 나타나고 있다고 짚었다.
이 원장은 "보수와 진보 등 정치적 배경과 관계없이 큰 정부를 선호한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며 "건전재정을 지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의회 예산국과 한국의 국회 예산정책처의 전망을 보면 미국은 현재 120%수준인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이 2055년 160%로, 한국은 현재 50%내외에서 2055년 120%, 2072년 170%로 급격히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자비용도 급증하고 있다. 이 원장이 분석한 UN 자료에 따르면 약 34억명의 인구가 건강이나 교육에 대한 예산보다 정부부채에 대한 이자비용이 더 큰 국가에서 살고 있다. 미국도 이자비용이 국방이나 의료 예산보다 큰 상태다.
더 큰 문제는 정부가 지출을 늘리면서 재정 확보 계획은 없다는 점이다. 이 원장은 "경제학 기초이론에서는 정부가 재정을 확대할 때는 세금을 높여 자금을 조달한다"며 "이 경우 사용하는 주체만 바뀌기 때문에 물가를 자극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밀튼 프리드먼이 '물가는 화폐적 현상'이라고 말한 배경이다.
반면 지금과 같이 국채를 발행해 빚을 계속 쌓는 형태로 재정 확대가 이뤄지는 경우엔 물가가 오른다. 기존에는 정부가 이자비용 부담 때문에 중앙은행에 물가 관리를 위한 금리 인상을 자제하도록 하기 때문에 물가가 오른다는 견해가 있었지만 이 원장은 "중앙은행이 독립성을 유지해도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간단한 정부의 예산제약식을 통해 이를 설명했다. 국가채무의 실질가치는 기초재정흑자의 현재가치와 같다는 이론을 토대로, 현재까지의 부채를 물가로 나눈 값과 정부의 '수입-지출'을 등식화한 것이 예산제약식이다.
기존 이론에서는 정부가 지출을 늘리면 증세 등으로 수입을 증가시켜 등식을 맞춘다. 하지만 수입과 관련 없이 지출을 늘리는 경우엔 변동할 수 있는 것은 물가뿐이다. 물가가 높아져 현재가치가 떨어져야 늘어난 지출에 따라 감소한 '수입-지출' 항목과 같아질 수 있다. 이 원장은 “지출 축소나 증세 등 정치적으로 어려운 결정을 피하면 재정확대에 따른 ‘인플레이션 세금’을 걷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방식으로 물가가 올랐을 때는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효과도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 원장은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리면 정부의 이자비용이 늘어나고, 다시 국채를 발행해 해소하는 악순환이 나타난다"며 "중앙은행이 적극적으로 대응할수록 물가가 더 오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원장은 "이런 현상은 현재 미국 등 주요 선진국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코로나19 이후 미국에서 GDP 대비 부채비율이 낮아진 것이 부채 감소가 아닌 물가 상승에 따른 명목 GDP 확대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 원장은 "정부 초과지출의 약 80%가 '인플레 세금'을 통해 조달됐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아직 이런 점을 우려할 수준은 아니라고 봤다. 다만 이 원장은 "한국은 부채비율이 낮아 아직 해당되지 않지만 빠르게 비율이 높아질 것으로 전망되는만큼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강진규 기자 jos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