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52시간 '철벽'…주저앉는 스타트업

입력 2025-12-17 17:48
수정 2025-12-18 01:14
“연봉을 더 줄 수 있고, 몰입하겠다는 연구원들도 넘치는데 시간만큼은 자유롭게 쓸 수 없다는 게 가장 답답합니다.” 휴머노이드 스타트업 에이로봇 엄윤설 대표의 호소다. 그는 “(중국 경쟁사와 싸우기 위한) 전쟁 준비를 해야 할 때 현행 노동 규제는 시간이 되면 불을 끄고 퇴근하라고 강요한다”고 토로했다.

엔비디아 종속에서 탈피하기 위해 자체 인공지능(AI) 칩을 개발 중인 스타트업 D사는 최근 핵심 개발 국면에서 일정 관리에 극도의 부담을 겪고 있다. D사 대표는 “반도체 테이프아웃(설계 완료)을 앞둔 두 달은 밤을 새워도 모자랄 만큼 집중해야 한다”며 “현실을 모른 채 현장에 일괄 적용된 주 52시간 노동 규제 때문에 열심히 일하고 싶은 직원들이 오히려 눈치를 보는 구조가 고착되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국내 벤처 생태계가 고사 위기에 빠졌다. 미·중 스타트업이 막대한 자본과 인력을 앞세워 개발 속도를 끌어올리는 상황에서 국내 스타트업은 ‘시간 싸움’이라는 출발선에서부터 발목을 잡혔다는 게 스타트업 창업자들의 하소연이다. ‘글로벌 AI 3대 강국’을 달성하겠다는 정부 목표와도 모순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를 대표하는 비영리 민간 지원 기관인 스타트업얼라이언스는 17일 이 같은 간극을 짚은 ‘스타트업 근로시간 제도의 한계와 대안’ 리포트를 발간했다. ‘한국형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을 서둘러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다. 고소득·고숙련 전문직과 핵심 관리 인력에만 근로시간 규제를 선택적으로 완화하되 직무 요건과 보상 기준, 건강권 보호 장치를 엄격히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동열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한국생산성학회장)는 “한국 근로시간 제도의 근본적인 문제는 장시간 노동이 아니라 월·분기 단위로 고강도 집중과 회복이 반복되는 업무 리듬을 주 52시간제가 포용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고 분석했다.

안정훈/강해령 기자 ajh632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