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작은 손길 모여 더 따뜻한 도시

입력 2025-12-16 18:08
수정 2025-12-17 00:07
자원봉사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내 아내다. 아내는 대학 시절 캠퍼스 커플로 만난 뒤 지금까지 큰소리 한 번 내지 않은 조용한 성격이다. 하지만 동네 어르신 도시락을 나르고 말벗 봉사를 하며 도서관 명예사서로 활동하는 모습만큼은 누구보다 적극적이다. ‘조용한데 강한 사람’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어느 날은 늦은 저녁 퇴근해 집에 오니 아내가 없었다. 전화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이렇게 시간이 늦은 줄 몰랐네” 하며 아내가 들어왔다. 어르신 도시락을 배달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며 멋쩍게 웃었다. 그 순간 ‘봉사는 결국 이런 자연스러운 표정에서 시작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청장이 되고 난 뒤 행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더 깊이 체감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마을의 온기, 공동체의 결속은 결국 서로를 향한 작은 마음에서 자라난다. 그래서 나는 자원봉사를 더 넓히고, 더 단단하게 만드는 일에 힘을 쏟아왔다.

자원봉사센터를 사단법인으로 전환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민간이 중심이 돼 기업과 주민이 함께 힘을 모으자 봉사는 더욱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움직임으로 확장됐다. 그 흐름은 국경도 넘었다. 자매도시인 몽골 사막화 지역에 ‘성동 숲’을 조성하기 위해 주민들과 함께 2000그루의 나무를 심던 날, 한 봉사자가 “청장님, 우리는 지금 지구의 미래를 심고 있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 한마디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2022년 울진·삼척 산불, 2023년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 올해 의성·하동 산불 피해와 홍성 수해까지, 국내외 재난 현장에서 성동구 봉사자들은 구호물품, 구호금, 간식차, 복구 지원 등으로 가장 먼저 움직였다. 위기 속에서 빛나는 건 결국 시민의 힘이라는 사실을 수없이 확인해 왔다.

얼마 전 ‘성동구 자원봉사자의 날’ 행사에서 누적 300시간 이상 ‘동장’, 1000시간 ‘은장’, 2000시간 ‘금장’, 3000시간 ‘봉사왕’들을 기념했다. 올해 처음으로 1만 시간 이상 봉사한 ‘봉사 명장’ 9명에게 훈장과 메달을 드렸다. 그런데 행사 도중 뜻밖의 얼굴이 나타났다. 바로 아내였다. 654시간을 봉사해 ‘동장’ 수상자로 이름이 불린 것이다. 인증서를 건네며 잠시 안아줄까 고민했지만, 아내는 쑥스러운 듯 빠르게 뒤돌아서며 자리로 내려갔다. 가족으로서도, 구청장으로서도 고맙고 벅찬 순간이었다.

자원봉사는 거대한 변화의 출발점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변화가 시작되는 가장 부드럽고 따뜻한 지점이다. 성동구의 변화는 그런 작은 온기가 모여 이뤄졌음을 되새겨 본다. 도시를 따뜻하게 하는 주인공은 특별한 영웅이 아니라 조용히 시간을 내 이웃을 돌보는 평범한 봉사자들임을.